우리는 종종 우리가 안온함을 느끼는 반석이 얼마나 얇은 껍질인지를 잊는다. 


 후한은 기원후 25년에 개국한 나라로서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뒤를 이은 국가다. 한번 망했음에도 15년이 지나 다시 건국되었고, 그 상태에서 200여년을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후한 말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후한은 그냥 원래 있는 나라, 그냥 당연한 것, 당연히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후한은 처음 광무제가 국가를 세웠을 때부터 황제권한이 약해 연립정권을 세워야 했던 국가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황제는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였던 국가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황제는 두 가지로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했는데 하나는 주자사(광역자치단체장)보다는 그 아래 태수(기초자치단체장)의 권한을 높여줌으로써 중앙에 대적가능한 지방의 힘을 깎으려고 했고, 둘째로 신권과 대립하는 자들로서 내시들, 그러니까 환관들의 권한을 세움으로써 대립하려고 했다. 후자가 특히 문제가 되었다. 


 환관을 정치적 세력으로 활용하려고 한 왕조는 한 둘이 아니다. 환관은 대를 이을 수가 없고, 친족 관계가 상실되며, 무엇보다 남자들에게서 존경을 받기 어려운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황제/왕의 관점에서 자신과 경쟁하지 않는 세력으로서 믿을만 하다. 비잔틴제국의 역사에 남은 자들 중에서도 환관들이 있고(나르세스) 당장 한국의 중세/고대사에도 이름이 남은 환관들이 다수 있다. 이들을 활용하려고 한 것 자체는 가능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황제와 황궁을 관리하고 운용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처음 그들을 기용한 황제는 이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겠지만, 그 이후의 황제들도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것. 후한에서 일어난 일이 이런 것이었다. 


 강대한 외척인 양기가 순제가 황제이던 시기부터 대장군으로 재임하면서 국정을 그야말로 농단했는데, 자신의 가족에서 제후나 대장군을 십여명을 낼 정도로 부패했다. 어린 황제인 충제를 즉위시켜 더욱 권력을 휘두르던 양기를 물리친 것은 바로 그 다음 황제인 환제. 환제는 환관 조등(조조의 조부인 바로 그 환관)의 도움으로 취임했고, 조등의 부하들인 환관들을 이용해 양기를 탄핵했고, 자연스럽게 환관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 시절 환관과 환관위 주변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탁류파. 반대로 이들과 다르게 유학자로서 탁류파를 논박하던 이들을 청류파라고 불렀다. 환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환제 자신과,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환관인 조등이 이들을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영제가 취임하면서부터는 문제가 점점 더 커져갔다. 이 시대의 신흥 환관인, 삼국지의 맨 초입부를 장식하는 십상시가 바로 이 시대에 나타난다. 십상시는 스스로를 열후로 봉할 정도로 국정을 다시 농단하기 시작했고, 청류파들은 이들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대항하고 나선 것. 


 이 청류파가 이름은 맑을 청을 쓰고 있지만 꼭 반드시 청렴결백하고 의기에 차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대지주였거나 누대의 귀족이었고, 이들도 단지 황통과 신권을 사이에 끼어들어 부패를 벌이는 환관들에게 문제 제기한 것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농단하던 탁류파에 비해서는 확실히 맑았다고 할 것이, 어쨌든 권력형 부패 자체는 적거나 안 저지르기는 했으니까. 이 시대에 탁류파로 아마 꼽혔을 대표적인 가문 출신인 원소는 6년상을 탈상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청류파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자리 매김했고, 자신의 나이나 지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입지를 갖게 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는 십상시와 대장군 하진이었다. 십상시는 황제의 바로 옆에서 황명의 출납을 관장했고 신하들이 황제와 만나는 일정과 내용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서원팔교위라는 제도를 설립하여 십상시 아래 환관인 건석을 수장으로 임명했는데, 서원팔교위는 중앙군을 총괄하는 8명의 교위를 뜻했다. 이들이 중앙군을 총괄했고, 중앙군의 모든 조직은 원칙적으로 이 아래에 해당한다. 전군을 총괄하는 대장군부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장군은 대장군이고, 전군을 총괄하는 지위는 어쨌거나 의미가 큰 지위였다. 중국 역사에서 대부분 대장군은 승상과 동급이거나, 혹은 승상 아래 3공에 해당하는 지위에 해당했는데 후한시대의 대장군 역시 3공과 같은 지위로 간주되곤 했다. 이 대장군 하진은 자신의 여동생이 황후가 되어서 십상시에 의해 출세한 자이지만, 그것만으로 출세했다고 보기는 힘들 정도로 나름 정치적 감각을 갖고 있던 자였다고 할 것이다. 하진은 황건적의 난을 거치면서 실효적인 권한을 갖게 되었고 특히 청류파들에게도 인망을 얻게 되었다. 원소가 하진에게 접근한 것이 이 시점이었다. 권한과 지위는 있으나 인재풀이 부족하던 하진은 원소의 접근 하나로 순식간에 많은 참모진을 얻게 되었고, 이들은 하진을 이용해서 십상시를 척결하려고 했다. 


 하진이 십상시랑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된 것은 영제의 사망 이후 있었던 황제 옹립 과정이었다. 십상시의 아래였던 내관이며 서원팔교위의 장인 건석이 새로운 황제로 유협을 옹립하기 위해 문제가 될 대장군 하진을 암살하려고 한 것. 그러나 하진은 우연과 행운이 겹쳐 이 암살에서 벗어났고, 결국 새 황제는 하진의 여동생이 낳은 유변이 황제가 되었다. 이후에 건석은 자신의 암살 시도를 하진이 아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금군을 들어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바꾸고 하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십상시들은 하진에게 도리어 건석의 쿠데타 정보를 알려줬고, 건석은 처형당한다. 


 원소가 보기에 환관들은 정말 큰 문제였다. 황제가 바른 정치를 해서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기본이고 정의라고 한다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는 환관들은 그 자체로도 부정의이지만 이들의 부패로 인해 정치체제 자체가 흔들리고 당고의 금과 같은 사건들을 거치면서 사대부들이 국가체제에서 이탈하는 것은 더욱 문제였다. 애초에 환관들이 권한을 갖고 있는 이상 황명을 환관들이 계속 내놓을테니, 환관 체제 자체를 흔들지 않으면 아마도 대신들이 제대로 역할할 수 없는 상황이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원소는 이 문제를 후한 국체 자체를 흔들 문제로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원소가 강경책들을 쏟아낸 것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원소는 십상시들을 척결하기 위해 하진이 직접 주살할 것을 원했고, 중앙군을 동원해서 십상시의 권력기반을 비롯해서 주요 환관들을 모두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진의 권력기반이 곧 청류파와 십상시라는 두 축에 의해 갖춰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십상시를 들어서 칠 권력이 바로 중앙군이라는 점이 문제였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진이 십상시를 물리적으로 척결한다면 당연히 다음 차례는 하진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십상시가 있다면 청류파는 십상시를 공격하고 하진을 공경할 것이지만 십상시가 사라진다면 자신의 기반은 청류파 뿐이고, 그때가 되면 청류파는 아마도 기반이 부정한(성장 기반은 차치하고 보더라도 하진은 외척이다) 하진을 공격할 것이 뻔했다. 애초에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십상시를 척결할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였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대장군부가 실제로 동원 가능한 전력은 중앙군이고, 중앙군은 십상시가 통괄한다. 과연 중앙군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이 십상시에게 정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있다고 해도 십상시의 혜택을 봐온 중앙군이 자신의 뒤를 따라 십상시를 척결할 수 있을까? 이런 점들이 문제였던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원소가 여기서 제시한 대안은 십상시를 자발적으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태후와 십상시에게 강력한 압박을 주기 위해서 지방의 태수들이 거느린 군대를 수도 인근으로 불러올리고 그 군세로 압박하자는 것. 하진은 여기 따랐다. 그래서 서량의 엄청난 변방에서나 오가던 동탁과 그의 군대가 낙양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여포를 거느린 정원의 군세가 낙양에 온 것도 이때였다. 정원이 부임해있던 병주는 여기서 먼 지역이지만, 이때 합법적으로 낙양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하진이 이 대안을 지지한 것은 나름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앙군은 하진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쿠데타에 응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다른 문제였다. 특히 중앙군은 십상시의 사병화도 진행되어 있던 상태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방군은 낙양에서는 오직 하진 한 명이 총괄하는 군대였고, 따라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해서 황궁을 압박하고 정치적 작업을 병행한다면 큰 무리없이 대권을 잡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연히 이 계책은 이미 그 당시에도 굉장히 위험한 행위라는 의견이 많았다. 지방의 치안이나 국방은 물론이거니와 애초에 지방관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에 영향을 끼치는 관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소는 계책을 강행했고 하진은 이를 받아들였다. 모택동처럼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기본적인 권력 문제만 생각할 수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중앙군으로 지방군은 컨트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이미 평화와 안정이 유지된 경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착각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런 류의 안정 - 시민/문관에 의한 군부에 대한 지배는 역사적으로 종종 빠르고도 간단하게 깨지곤 한다. 


 후대의 우리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지만 이 계책은 굉장히 문제가 된 계책이었다. 단순히 부정부패가 있고 바르지 않은 정치가 오가던 후한은 동탁의 학정과 군벌의 종횡, 학살, 기아, 전쟁, 이민족의 침략을 거쳐서 약 400년의 혼란기를 겪는다. 단순히 삼국시대만 친다고 하더라도 60여년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인구의 50~80%가 유실된다. 원소가 생각하던 국가 체제의 문제는 기실은 정권의 문제였고, 그 계책으로 인해 나타난 건 중앙정부의 지방관에 대한 통제 불가능성, 그로 인한 군벌의 종횡과 전쟁이었고 그래서 잃은 것은 국체였다. 지방관들이 군대를 이끌고 상경했으나 하진 자신이 십상시에게 살해당했고, 그 혼란 와중에 하진의 부관으로서 권한을 대행한 원소가 십상시 척결에 신경쓰느라 상경한 지방군들에 관심을 놓친 사이에 동탁군이 낙양성을 치고 들어와 중앙군을 흡수하고 삼국지 초반의 그 20만의 대군세를 형성한다. 


 정권을 잡은 동탁의 패착은 문제를 더욱 키웠다. 그는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는데, 동탁이 군사력으로 수도를 장악했지만 명예도 권위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과 같은 강력한 지방관은 없지만 지방관들은 나름대로 강력한 입지를 갖고 있었고, 이들은 청류파로서 권위나 학식도 갖춘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하진을 도와 십상시를 몰아내고자 한 것은 바로 청류로서 보황을 위한 것이었는데, 보황의 반대로 극을 달리는 인물이 들어서서 황제를 마음대로 퇴임시키니 이것은 왕망의 재림에 다름없어 보였을 것이다. 이때 이들 지방관들은 한나라의 지방관료이자 군사령관들로서의 직함과 책임감과 명분을 그대로 갖춘 채로 중앙정부에 대립하는 군대를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18로 관동군이다. 이 시점에서 낙양의 지방에 대한 권위는 끝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동탁이 황제를 끼고 돌았으면 이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관동군이 원소를 맹주로 세운 건 그가 청렴하고 강직하며 부패한 정권에 오래도록 대항한 자라는 점, 그러면서 능력있고 강력한 가문의 힘을 업고 있다는 점이 작용한 것일 것이다. 원소는 군을 일으켰기도 하거니와 당연히 낙양의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는 없었는데, 그를 대신할 환제의 직계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원소는 그래서 황족으로서 전 황제와 가까운 친척이고, 나이도 있고, 능력도 있으며, 명망이 높았던 유우를 황제로 새로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유우는 정통성도 높았고 이 정도로 전국적인 반발이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황제가 되었다면 관동군 전체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후한은 아마 상당 기간 더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우는 글자 그대로 인망 때문에 이 추대를 거절했다. 유우는 아마도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고 자신이 나서는 건 겸양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 같고, 그 선택이 한나라 자체(정체)를 넘어서 한나라가 가져다준 여러가지 혜택 - 내일 죽지 않을 기대감, 일을 하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믿음, 백성과 정부가 있다는 생각 - 의 기본적인 값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는 겸양했고, 관동군은 결집되지 못하고 정통성 면에서 반군으로서만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다. 공손찬이 후에 유우와 싸울 때까지도 여전히 원소에게는 유우라는 패가 한나라 체제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패로 있었을 것 같아 보이는데 그는 끝내 다시 이 패를 꺼내지는 않았다. 실패한 패로 생각한 모양. 




< 연습문제 > 


(1) 황제가 환관을 이용해 신권을 제압하는 건 그 시점에서는 좋은 선택일 수는 있겠지만 후대의 황제에게는 또 다른 감당할 수 없는 대립세력을 만드는 꼴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환제는 황권이나 권력갈등관계가 다음 황제 대에서도 큰 문제일 지언정 체제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십상시는 십상시 외부에서 십상시를 단일한 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그들은 "십상시의 난"을 실제로 일으킨 건석이 십상시가 아닐 뿐더러, 건석을 십상시 손으로 처리했으니 문제가 해결되었고 다시 하진과 밀월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3) 원소는 지방군을 불러올렸는데, 그들이 벌일 수 있는 최악의 상황 - 국체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통제가능하지 못한 패는, 그 패가 벌일 수 있는 문제점의 범위까지 고려한 뒤에서 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안정된 체제는 그러나 종종 사람들의 눈을 흐린다. 특히 군이나 무력은 더욱 그렇다. 평화가 길어지면 무력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인다. 도리어, 그 본질에 상응하는 방책들이 대책인 것처럼 횡행하기도 한다. 


(4) 동탁은 진실로 어리석었다. 그가 한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피로 피를 씻는 개혁을 벌이는 자로 비춰지는 현대의 창작물들이 조금 있는데, 전혀 그렇게 볼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 그는 대체로 "황실을 타고 앉아 권력을 뿌렸으면서" 동시에 "황실의 권위를 깎아내는 일들을 방책이랍시고 활용해댔"다. 황제를 멋대로 폐위하고 올린 점, 수도를 단순한 전술적 유불리만으로 태워버리고 옮긴 점, 자신의 지위를 자신 스스로 부여하여 황제의 권위를 깎은 점은 권위에서 곧 충성이 나오는 왕권체계에 대한 이해가 없던 것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패배하고 죽은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5) 유우는 한나라가 선사한 혜택이 단순히 황권이나 정부 같은 수준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나 국체의 안정성이 주는 혜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500미터 이상 이동하는 동안 죽지 않을 수 있고 앞으로 5일 이상 생존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봐야할 것이다. 아프리카나 남미가 미개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이 시대가 그런 것 아닐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유념하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라는 게 생각이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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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취미 중 하나는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들 이야기 받아다가 좀 스트레스 받으면서 논평하고 비판하는 건데 이게 종종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야단을 맞는다. 그냥 그런 이야기를 보지 말라거나, 애초에 신경쓰지 말라는 것. 사실 이런 취미는 정신건강에 안좋을 뿐 아니라 지적 역량을 낭비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점에서 문제이긴 한데 그래도 난 이런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1. 누군가는 좀 그래도 논평을 해줘야 헛소문이 퍼지는 과정에서 비판자들이 갖다 쓸 이야기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아무리 어리석은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비판은 그리 간편한 짓은 아니다. 대행자 하나 정도 있으면 좋지 뭐... 


2. 사실 내 역량이 그리 전문가도 아니고 나같은 범부가 논쟁을 하고 치고 박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야 진짜 전문가들이 가소롭게 여기시어 강림하지 않을까?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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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평.

카테고리 없음 2014. 8. 8. 14:46

군대 조직 내부에 어떤 제도를 만들든 그건 군대 내부의 신고체계가 된다. 그건 그 사회 내부의 것이고, (실제야 어떻든) 군인들이나 군필자들은 그게 잘 돌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오는 대안들은 군 외부의 신고체계라고 하는데 이건 크게 두가지 중 하나가 된다고 본다. 하나는 군 체계 자체가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 또 하나는 정치장교제도. 둘 다 군 본연의 역할을 못하게 한다는 건 동일한 거 같다. 군대 가혹행위 문제가 간단하다고, 혹은 보틀 포인트가 있다고, 아니면 대안 몇가지로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번 사건 이후의 논평에서 "군 본연의 임무" 부분을 고려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현재까지 나타난 피해들의 크기가 너무 크기 때문에 (나도 동감이다) 뭐 어떻게 해서든 개선해야할 거 같은데 방법이 막연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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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시리아 사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시리아는 자신이 중동 유일의 민주국가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서구적 가치를 따르는 신봉자라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시리아는 자기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군대’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서구 미디어는 독재자 알아사드를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평화의 사도’로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자칭타칭으로 ‘민주주의 본보기’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이 시리아 정권과 비교가 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겉으로 보기에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하지만 자기 국민도 아닌 다른 민족을 지배하며, 소요가 생기자 매일같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압제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민주주의 정부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왜 시리아는 놔두고 이스라엘만 욕하냐구요?" , 파스칼 보니파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http://newspeppermint.com/2014/08/03/syria_israel/)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겉으로 보기에 민주주의국가" 인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제한이 없는 투표권이 주어진 보통선거제도를 책정하고 있고, 투표가 비밀로 이뤄지며, 연령이나 재산 등에 따른 투표권 차등이 없고, 투표권자 자신에 의해서 투표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 선거 제도의 기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실효적으로 정권이나 의석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선거의 결과에 정당 및 국민이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투표에서 지면 내전이 벌어진다거나, 국가가 분리되어 버린다거나 하는 경우는 기본적으로 대의제에 의한 민주주의가 구동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선거가 사실상 이뤄지지 않고 있거나, 직접 선거가 아니거나, 비밀선거가 아닌 모든 제도들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걸 하고 있고, 다른 중동 국가들 중에는 이걸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이 좋은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이냐, 나쁜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이냐는 생각해볼만한 이슈지만 최소한 이스라엘이 민주주의 정부가 아니라는 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예컨대 우리가 관행적으로 연쇄살인마, 강간범을 "인간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나쁜 인간"이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또한 성자에게 대해 우리는 "그는 인간을 초월했다"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인간"인 것이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옳고 바르고 깔끔하고 예쁘고 좋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한 도구이고, 그렇기 때문에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저 소장식으로 생각할 때 그걸 놓치기 쉽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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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톨릭 개념 중 사효적 효력과 인효적 효력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가지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오늘날엔 주로 후자의 의미로만 쓰인다. 첫번째 의미는 세례나 혼인성사와 같은 각종 성사의 의미는 그 절차와 예식의 형식이 성경 자체와, 성경에 대한 교황청의 해석에 걸맞게 이뤄졌는지에 따른 것이며 성사를 집전한 사람이 누군지와는 상관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사효적 효력이 우선하며 인효적 효력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약하다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는 여전히 성사의 효력은 절차와 예식 규범에 맞았는지에 따르지만, 그 효력의 강약을 결정하는 건 성사에 참여한 성도 자신의 마음 가짐에 달렸다는 의미이다. 신앙적으로는 후자가 중요하겠지만 신학적으로는 전자가 중요하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등 다신교 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효적 효력을 강조하는 논리에서는 살인범이 절차에 맞게 집전했다면 그 성사는 인정되고, 성인으로 시복된 사람이 성사를 집전한다 하더라도 절차가 틀렸다면 그 성사는 효력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복된 사람이 제대로 집전하지 못할 리는 별로 없지만) 이것은 신이 인간과 애초에 "격이 다른" 존재이고, 성경은 바로 그 신이 내려준 것이라는 의미에서 유추된 것이다. 인간 중 가장 사랑 받을 이라 하더라도 신과 비견될 수는 없기 때문에, 신 자신이 지정한 예식의 방법과 절차가 집전자 개인의 능력이나 인격보다 훨씬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성당의 예식은 신도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오늘날에도 엄청나게 형식에 집중*1하고, 어느 성당에 가더라도 크게 차이 없는 방식으로 미사를 집전한다. 


 종교에서와 다르게, 현대 공화주의/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또한 좀 다르게 형식을 중요하게 본다. 여기서의 형식은 곧 헌법-법률-시행령-해석의 연쇄로 이뤄진 행정체제를 말한다. 헌법은 어쨌든 일정 시점의 국민적 합의로 형성된 것이라고 전제하고, 법률은 그에 따라 국민들이 정한 대표자들이 결정하도록 하며, 거기에 따라서 헌법과 법률에 예정된 범위 내에서 행정부가 해석해둔 시행령과 규범들에 따라서 현장에서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행정에서의 형식주의이다. 예를들어 진정한 실질로 보면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겐 엄청난 재산이 은닉되어 있을 것이 세무 공무원 경험과 직감에 번연히 보인다고 해도, 법률에서 규정한 대상재산과 방법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형식주의이다. 


 형식주의가 중요한 것은 법률이나, 심지어 행정 집행이란 권리침해가 심각할 수 있는데 반해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급부행정이라고 해도 수십만명 이상이 대상이 되는 사례가 빈번하고, 심지어 규제행정이라고 하면 통상 전국민, 전기업, 전 근로자 등등이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여기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기준이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내일부터 해가 뜰 시간을 좀 당겨야 한다", "내일부터 회계준칙에 사용될 연산 방법은 1+1=7로 하자" 같은 이슈라면 그래도 자연법칙이나 산수 등을 이용해서 쉽게 기준을 정할 수 있는데(정한다기 보다 그냥 법칙이나 산수를 따르면 되는데) "내일부터 관공서 업무 개시시간을 한시간 당기자" "내일부터 회계 준칙에 사용될 사칙기호는 ^%$로 하자" 같은 것이 되면 논의의 여지가 아무래도 있을 수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기 입장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떤 근본적인 곳에서 힘을 끌어와야 하고 그것은 당연히 민의여야 하는데, 매 사안마다 민의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효율성 면에서도 문제가 있는데다가, 당연히 합치성에도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태적확률일반균형 모형에 입각한 국민소득/노동시장 영향성 검토 결과에 입각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반복적 참여 제한 규제 강화  타당성" 같은 것들을 매번 국민투표하기도 옳지 않고 애초에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종사하지 않아본 사람이 낸 의견의 타당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법률에서 범위를 정해주고 그 범위 내에서 정부와 연구자들이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재량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정치/정책/행정 영역에서의 형식적 논리의 중요성 이야기를 하면 여전히 의문을 갖기 마련이다. 실질과 민의를 매번 따지는 것이 오히려 옳은 것이 아닌가? 형식 주의는 기본적으로 실질을 매번 조금씩 혹은 많이 도외시하는 것 아닌가? 와 같은 의문이 자주 등장하는 의문이다. 그럴까? 매사에 실질을 따지는 건 쉽지도 않을 뿐더러 민의가 과연 무엇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는 걸 생각해 봐야 할 것이지만, 그보다는 법률이나 시행령, 법해석이라는 형식 자체가 기본적으로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에 거기서 일탈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실질의 반영이 어렵다'는 사람 중 일부분은 (소수겠지만) 그 규정이 있음으로해서 피곤해 하는 그런 이해당사자일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반대로 그런 지적이 정말 타당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정말로 무의미한 형식, 무의미한 법률이 있을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그걸 없애고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야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계속 내거나 철폐하는 것을 실적화(입법 실적)하여 공표하는 것이고, 국민 청원이라는 제도도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돌릴 수 있기 만무하다. 저런 식의 프로세스는 평시의 상황에서나 적용 가능한 것이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 즉, 당장 지금 목전에 와있는 미증유의 재난 상황, 이미 터진 전시에서는 형식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마련이다. 애초에 형식주의에서 정해둔 그 형식을 일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범죄자들, 탈세범들이나 혹은 외세라면 더욱 문제가 되기 마련이다. 이런 이들을 대비해서 규제나 대비책을 촘촘히 마련해두면 그건 정직한 일반 시민들의 삶을 고통으로 만드는 게 될 것이고, 반대로 허술하게 만들면 그런 이들이 활개칠 영역이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를 대비해서 보통은 고위직 주관의 TF 체계를 만들 수 있는 "형식"들을 사전에 갖춰두는가 하면, "일반위임"과 같은 형식적 결단을 미리 법에서 예비해두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경찰관의 업무 범위에 대한 기본법인 「경찰관직무집행법」에는 제2조제5호라는 일반적 위임 규정이 있는 거고 「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 「계엄법」 같은 법이 있는 것이고, 각 법률에도 예컨대 「고용정책기본법」 제30조의3(고용재난지역에 대한 지원) 같은 규정을 두는 것이다. 


 이런 예외를 두는 이유는 그것이 민의나 실질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봐, 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 모든 미래 상황에 대해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절차적인 하자는 그것이 실질과 무관한 형식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전체 행위 자체의 위법성으로 가게 되는데, 예컨대 정말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업임이 명백하게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업이 「환경영향평가법」 제9조에서 정하는 사업이고, 동법 제13조에 따른 공청회를 안했다면 그 사업은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업이므로 그 사업에 대한 허가도 위법해지는 것이다. 이건 실질과 상관이 없고 오직 형식 요건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명백하다면 민의와도 관계가 없을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대 민주주의란 것은 실제로는 민주주의, 대의제, 공화주의, 입헌주의, 기본권사상 등등등이 결합되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결합되어 돌아가는 기본 원리의 근간은 "매사에 민의를 받들어 그대로"가 아니라 "민의가 결정한 큰 틀 내에서 그 범위에 따른 형식"이라는 형태로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정 절차가 틀린 경우 그것이 실질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행정절차에 따른 행정처분 자체가 위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현대적 국가 체제다. 이걸 너무 간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싶다. 


*1. 그나마 이건 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굉장히 간소해진 것이다. 그 전까지 적용되던 1570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정된 미사 방식에서는 세계 어디서 집전하든 무조건 라틴어로 각종 성사를 집전해야 했으며, 신부는 최소 매일 1건 이상의 미사를 집전해야 했고, 미사의 내용도 예컨대 영성체만 해도 이전에는 무조건 혀로 받아야 했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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