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읽으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살던 곳이 촌이라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대학에 가서 보니 아직 번역이 없었던 것이었다. 군 시절엔 토스타인 베블런의 서적들이 아직 대체로 번역이 안되어 있다는 것에 놀란 적 있다. 하긴 도덕정조론이 번역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니까.

한국어로 된 고전이나 주요 논문이 많은 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전이나 최신 주요 논문을 읽는 한국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읽는 이는 보통 학자지망생이거나 기타 엘리트 층이기 마련이고, 이들이 세계 최신 조류나 그 근간에 밝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보면 된다고 하지만, 나같이 영어 모르는 자도 있는데다가 여튼 모국어가 더 이해가 빠르기 마련이니까.

난 사실 그래서, 과기부나 문체부 등에 산하기관을 하나 신설해서 석박사를 갓 마치거나 혹은 박사과정에 있는 자 중 최대 2년 정도를 고용한 다음, 미번역된 고전이나 최신 논문들을 번역하는 작업을 시키는 국가적 사업을 하면 어떤가 싶다. 번역과업은 상업적 출판 가능성이 낮은 저작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니 민간 시장을 훼손할 가능성도 낮고. 일종의 장학금 사업으로 볼 수도 있거니와, R&D 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사철 같은 취업이 어려운 전공 연구자에게도 고루 기회가 갈(사실 더 갈)수 있을 것 같다.

세부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과기부 소속 과학기술혁신본부나 문체부 소속 신설 조직에 “번역과업 선정위원회” 기능을 부여한다. (2) 공공기관을 설립하여, 최소 석사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들을 2년 이내 기간동안만 채용한다. (3) 번역과업 결과물은 원칙적으로 전자적으로 공개한다. 저작권 없는 경우 국공립 도서관 및 홈페이지에, 저작권 있는 경우 상업적 출판도 고려한다. (4) 저작권 해결 등을 위한 일반 공공기관직원으로 구성된 지원부서를 둔다.

500명 정도의 젊은 학자를 고용한다고 하면, 소책자 형태의 논문을 1인당 연간 6-7편 번역가능하다고 하면, 1년에 약 3,000편 정도를 번역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매우 적은 수 이지만 지금보단 현저히 낫잖아(....) 1인당 연 4천만원을 준다고 치면 인건비로 200억원을 지급하게 된다. 대한민국의 연간 R&D 예산의 0.1%다.

연구자 관점에선 3천편이면 “1년에 자기 분야 논문이 1편 번역됨”이라는 소리라서(......) 큰 효용이 없을 거 같은데, 근로장학금 개념으로 바꿔서 연봉주지 말고 번역시키면 이제 번역시장 교란 우려가 있다. 차라리 처음부터 학부생이나, 관련산업종사자를 대상으로 하면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1) 구글번역기가 충분히 발전해버리면 소용없는 제도가 된다 (2) 국문학/국사학 연구자는 여전히 구제가 안된다 (3) 효과성이 너무 간접적이라 기재부 통과가 안될 것이다, 는 문제가 남긴 한다.

논문의 저작권 문제는 내가 잘 모르는 과제라 이렇게 해소 가능한 것이긴 한지 잘 모르겠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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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이전까지의 동아시아권 유학자들은 대체로 내시, 환관의 궁내 배치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였다. 항시 왕/황제의 근처에 머무르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함께 하며 왕/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아첨꾼으로 본데다가, 군주의 직할세력으로서 신권 臣權과 대치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근본적으로 비선조직이기 때문이다. 이에 유학자들은 기회만 되면 환관조직을 해체하라는 요구를 하기 마련이었다.

 조선왕조 초반에도 이같은 움직임이 있었는데, 실패했다. 고려시대에는 내시부(궁 내에 거주하며 왕을 모시는 신하조직)에 해당하는 역할을 일반 남성들이 맡았으나, 조선조에는 환관들이 내시부를 맡게 되면서 오히려 권한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태조 1년차 사헌부의 상소를 보면 당시 관점을 알만하다. 위에 말한 두 가지 관점이 모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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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째는 환관 물리치는 일입니다. 환관이 걱정이 되는 일은 오래 되었습니다. 진나라의 조고와 한나라의 홍공·석현과 당나라의 이보국·구사량은 더욱 그 중에서 심한 자들입니다. 더구나, 고려 왕조 말기에는 환자가 권세를 부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그 사람 된 품은 의식이 영리하고 언어를 잘하며, 안색을 잘 살피고 뜻을 잘 맞추게 되니, 이로써 인주가 왕왕히 그 꾀속에 빠져서 이를 깨닫지 못하고 권병을 옮겨서 화란을 발생하게 한 것이 대대로 그 자취가 잇달아 있었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그 중에 순후하고 신중한 사람을 뽑아서 옛날 제도의 수문과 소제하는 역사를 회복시키고 일은 맡기지 않으며, 그 노련한 간물과 매우 교활한 사람과, 탐욕이 많고 부끄럼이 없는 사람은 모두 놓아보내어 전리로 돌아가게 하여, 새로운 교화에 누가 되지 못하게 하소서.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20일 기해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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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관과 엄수는 궁문을 지키고 소제하는 것이 곧 그 직책입니다. 진나라·한나라 이래로 환관의 환난은 전적에 기재되어 있으므로 환하게 볼 수가 있는데, 혹은 구변이 좋고 아첨을 잘함으로써 군주를 미혹하게 하기도 하고, 혹은 군주의 총명을 가리움으로써 나라를 그릇되게 하기도 하였으니, 화란의 일어남은 진실로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하늘이 주신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성품과 난리를 평정하고 반정하는 재주로써 경사를 널리 보셨으니, 환관을 제어하는 데 반드시 그 방법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법을 만들지 않으면 뒷날의 폐단이 뜻하지 않는 기회에 발생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 그들 가운데 근실하고 조심성 있고 유약한 사람을 뽑아서 2번으로 나누어 매 1번마다 각각 15인씩으로 그 액수를 정하여, 궁문을 지키고 소제하는 역사를 맡기고, 그 나머지 경험이 많고 간사한 사람은 일체 모두 내치시어 근시하지 못하게 하소서.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9월 21일 기해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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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결국 태조 1년 7월28일 내시부를 환관직으로 삼는 안이 결정되었고, 내시부 아래 내수사를 두었다.


 조선왕조 기간 내내 당대 최대의 부자는 항상 왕이었는데, 이는 함경도의 1/3이 영지이고, 만명 단위의 노비를 보유하고 있던 이성계의 재산이 이어져내려온 결과였다. 왕은 그 본인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내수사를 두어, 조정과 분리하였다. 이에 호조 등에서는 국가 전체 부 富에서 왕실 재산 부분을 제외한 부분만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권 관점에서는 내시부에 대한 견제는 단순히 국정농단예비세력에 대한 견제일 뿐만 아니라 왕권에 대한 견제 성격을 갖고 있기도 했다. 따라서 왕은 거의 항상 내시부 혁파에는 반대 입장이었다. 문제가 생길 경우에도 문제를 저지른 내관을 처벌하거나, 승정원에 의해 내시부를 감사하게는 할 지언정 폐지 자체에 비답을 준 적은 없었다.

 

 현대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왕이 내밀었을 반대 논리는 간명하다. (1) 내시부는 내외의 교지를 소통하게 하는 자리이므로 없앨 수 없다. (2) (실록 등에 대놓고 언급되지는 않으나) 그렇게 24시간 궁 내에 사는 자들이 남자일 수는 없다. 이 두 가지 논리는 아마도 조선시대 내내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던 논리가 아닌가 싶다. 이 정도가 현대인의 내시에 대한 기본적 인식일 것이다.

 

 그런데 실록을 살펴볼 수록 이 논리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당상관은 조정에 출사하기 위해서라도 자주 궁에 드나든다. 경복궁 근정전은 명백히 궁 내인데, 근정전 앞에는 지금도 조례 때 각 남성 신하들이 줄 맞춰 서는 자리가 정해져있다. 궁에 남성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는 방증이다. 그렇게만 보면 내시직을 반드시 환관이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궁이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뉘어 있어서, 신하들이 드나드는 곳과 왕의 가정에 해당하는 곳이 달랐던 것 아닐까? 궁이 구분지어져 있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구분된 내부 측에는 남성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숙수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봉상시, 소격서 등에도 숙수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궁중조리는 이조 소속 사옹원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입궐해 음식을 만들었고, 대대로 숙수의 지위를 승계했다. 신분은 중인이었고 그 처우도 나쁘지 않았으나, 세습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는 점이나 조선왕조 내에서 조리기술의 지위가 몹시 낮았던 점을 보면 사실상 왕실에 종속된 지위로 보아야할 것이다. 이들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궁내외를 드나들었고, 소주방 특성상 여성 직원들인 궁녀들과 마주칠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내시를 반드시 환관으로 두어야할 필요성은 좀 낮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은 이렇게 설명된다. 숙수들은 궁에 드나들고 조리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소주방(=수라간)까지 출입이 제한되고, 실제 궁녀들은 여기서 만들어진 식사를 출납하는 것에 역할이 그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입증된 사실은 아니나,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세조실록의 기사가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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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刑曹)에 전교(傳敎)하기를,

"기석(奇石)이 수문 별감(守門別監)으로서 나인(內人)의 청탁하는 말을 듣고, 숙수노(熟手奴) 동금(同金)을 불러 그로 하여금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오게 해서 나인(內人)의 궤반(饋飯)을 받도록 했으며, 최순의(崔順義)는 삼릉패(三稜牌)를 하지 않고서 함부로 수라간(水剌間)312) 의 내문(內門)에 들어가서 나인(內人)의 궤반(饋飯)을 받았으니 모두 추국(推鞫)하여 아뢰라." (세조실록 39권, 세조 12년 7월 22일 신묘 1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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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릉패가 없는 자는 수라간의 내문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들 숙수는 사실상 남자로만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5년 2월 10일 신유 5번째기사를 보면 궁 내외를 출납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나오는데, 이들은 모두 신부를 차고 다녀야 했으며, 총 590명 중 569명이 남자였다. 이들은 궁내외를 출납하되, 기본적으로 안밖소주방에 출납하던 것이고, 내전 등에는 들어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내시로서의 환관의 존재 근거가 숙수의 존재와 배치되지는 않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아마도 조선에서 궁 내에서 남자는 필요했으나 남성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관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긴 숙수는 많지 않다. 천대받는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름이 남은 가장 유명한 숙수는 안순환으로, 고종의 대령숙수였던 자였다. 이 사람은 궁에서 나온 뒤 자신의 기술을 바탕으로 명월관(`03년 개장), 태화관(`09년), 식도원(`21년)을 설립해 사업적으로 성공하였다. 이들이 바로 이른바 "요릿집", "요정"이었고, 여기서 차리던 상차림이 후대에 이름 붙이길 '한정식'이 된 것이다. 이곳에서 기생공연을 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내놓던 상차림이 반드시 '기생집 상차림'이 근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 이 항목에서는 나무위키랑 ㅇㅇㅇ(금기어)이야기를 끄는 게 맞지 않으려나.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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