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one year from the ratification of this article the manufacture, sale, or transportation of intoxicating liquors within, the importation thereof into, or the exportation thereof from the United States and all territory subject to the jurisdiction thereof for beverage purposes is hereby prohibited.        - The Constitution: Amendments XVIII, Section 1. (Passed by Congress December 18, 1917. Ratified January 16, 1919. Repealed by amendment 21.)



The eighteenth article of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is hereby repealed. - The Constitution: Amendments XXI, Section 1. (Passed by Congress February 20, 1933. Ratified December 5, 1933.)

 

-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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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는 그야말로 눈부신 시대였다. 한국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이던 이 시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별로 없다보니, 세계사적 사건인 1929년 대공황만 기억하기 마련인데, 이 대공황 자체가 바로 1920년대 장기호황의 끄트머리에 발생한 사건이다. 1921년부터 시작되었던 오랜 호황동안 주가는 4~5배 이상이 올랐고 임금도 적지 않은 근로자가 2~3배 이상 상승하여, 소비 확대를 향유할 수 있던 시기이다. GDP 자체가 42% 상승했고, 실업도 대체로 4% 수준에서 머물렀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미국에서 굳이 “Roaring `20s”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일만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1918년 1차 대전이 종료된 것이 사람들의 인식과 경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전쟁비용으로 지출되던 막대한 예산이 절감되었고, 사람들이 죽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전쟁사를 잘 모르는 현대인이 쉽게 짐작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당대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1차 대전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체제의 발달은 그때까진 상상도 못하던 대규모 병력을 모을 수 있게 해주었고, 철도기술의 발달은 병력을 놀라운 속도로 전장에 집결시키게 해주었으며, 기관총과 철조망, 콘크리트의 발달은 상상도 못하게 강력한 방어선을 선사했다. 수만명이 하루에 죽어나갔고 수십만명이 단 몇km의 구간에 집결하고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솜 Somme에서는 연합군이 단 9km를 진격하는데 양편에서 총 110만명 가량이 사망했다.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 하찮게 사라져 염세주의적 시각이 세계를 지배하던 이 시대가 1918년 돌연 종료된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가 개인 가구에 준 경제적 선물도 작지 않았다. 각국 정부가 발행한 전쟁채권이 일반 가계에 노동외 소득을 주었고, 전쟁기간 동안 동원된 남성들을 대신해 산업 현장에 뛰어든 여성들이 소득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스페인 독감이 이 새로운 경제적 선물의 향유 시점을 늦췄다. 전쟁과 함께 전세계로 퍼진 스페인독감은 1918년부터 2~3년간 2에서 5천만명의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아직 평균수명 향상의 효과가 미미하여 고령자가 적던 시기이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숫자의 위협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고, 자영업이 추락하였으며, 경제적 위기를 함께 겪었다. 다우존스지수도 1920년만 한정해서 본다면, 1919년보다 오히려 35%나 격감한 수치를 기록했다. 다만 스페인독감은 1919년말부터 돌연 사라졌고, 그 경제적 영향이 마무리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과 팬데믹 종료로 인한 낙관적 분위기와 경제적 부흥이 세계를 지배했다. 본격적인 경제적 ‘이륙’은 이 1920~1921년경에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이 만큼 전체 주가가 급격히 상승했다면 부자도 양산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랬다. 위대한 개츠비가 바로 1925년에 출판된 작품이고, 1922년을 배경으로 한다. 뉴욕 마천루 중에서도 눈에 띄는 디자인을 갖춘 크라이슬러 빌딩이 바로 20년대에 건축된 빌딩이다. (다만 완공은 대공황의 초입인 `30년이었다) 크라이슬러의 외관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 외장의 양식이 Art Deco, 알데코라고 흔히 일컫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를 상징하는 이 양식은 그야말로 20년대를 석권해서, 디젤펑크와 같은 ‘미국의 잘 나가던 시대’를 그리는 작품들에 반드시 등장하는 양식이 되었다. 밝고 폭발적인 색채의 대립과 함께 기하학적 형상들이 아로새겨진 건물과 내장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보통은 건축사적 유행의 변화는 매우 천천히 퍼지기 마련인데, 알데코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럴 돈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 빌딩 뿐 아니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도 이 시기에 지어졌고, 그 외에도 숱한 뉴욕의 빌딩들이 이 시기에 착공되었다. 

 

 미국인들의 눈을 장악하던 것이 알데코라고 한다면 음악은 재즈였다. 재즈의 전성기라고 할만한 시기였고,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전설적인 가수들이 이 시기에 크게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세대의 음악가들과 차원이 다른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무대의 질과 양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라디오였다. 1906년 최초의 방송에 성공했던 라디오는 1920년 최초의 상업방송국으로 발전했고, 1922년 최초의 정기적인 매스미디어 예능이 라디오에서 송출되었다. `20년대는 라디오의 시대가 되었고, 라디오의 제조업, 방송업, 예능 등이 급격히 세를 불렸다. 정부의 규제당국이 처음 구성된 1927년 전까지 라디오 산업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 무렵에는 약 40%에 가까운 미국인이 이미 집에 라디오를 갖고 정기적으로 청취하게 되었다. 최초의 방송이 시행된지 고작 20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디오는 자동차와 함께,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류문명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강고하게 형성하기 충분했다. 1913년 미국 전체에서 단 48만대 생산가능하던 자동차는 1924년에는 연간 350만대 생산 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이 시기 전국적으로 약 1500만대의 자동차가 판매되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가계들은 실질임금 상승과 함께 자동차 덕분에 생활 수준의 급상승을 경험했고, 모텔이나 드라이브인이 형성되었다. 당시에도 이미 고가품이었던 자동차와 라디오를 구매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할부거래’가 활성화되었고, 주가 상승과 맞물려 금융산업 발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신용거래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가 만들어준 광역권 유행과 함께, 미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가 바뀌었다. 

 

 자동차의 확산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시기는 정유산업의 폭발적 발전이 배경에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Standard Oil이 1911년 해체되고 만들어진 ExxonMobil , Marathon Petroleum , Amoco , Chevron 등의 회사들이 해체에 불구하고 급격히 성장했으며, 해체되었음에도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해외 유전회사들을 병합해나가던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어떤 의미로는 자원투자라는 식민경제를 대체할 새로운 모델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기실, `20년대의 폭발적 호황의 배경으로 흔히 지목되는 것이 바로 이 제2차 산업혁명이기도 하다. 19세기 말부터 천천히 발달하던 통신, 정유, 철강 및 내연기관의 발달이 꽃을 피운 것이 우연히 이 `20년대이고, 그것이 대호황으로 연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기 사람들이 기술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배경일 것이다. 

 

 기술의 혁신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 잡은 것은 바로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이었다. 1927년 “세인트루이스의 혼”을 타고 기착 없이 한번에 뉴욕에서 파리로 넘어간 찰스 린드버그는 새 시대의 기술적 혁신을 상징하게 되었고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항공산업의 희망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20년대 말에는 곳곳에서 예측되고 있던 미디어나 정유산업의 성장 둔화를 메꾸고 그 이상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들이 퍼져나갔다. 

 

 이 시기의 호황은 단순히 미국만의 것이 아니고 세계사적인 것이기도 했다.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는 이 시기를 Belle Epoch의 마지막 시기로 부르는데,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찬가가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Annees Folles라고 하는 시기인데, 마찬가지로 문화가 폭발하고 주가는 4.4배 증가했다. 넘쳐나는 돈은 유럽에서도 투르 드 프랑스를 활성화시켜 오늘날과 유사한 스테이지 구조로 안착시켰고, 다른 리그들도 부흥시켰다. 기득권이라 할만한 서구 남성들만 이 시기를 향유한 것이 아니었다.  호황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했고 억압을 약하게 만드는 법이다. 이 시기 여성 참정권이 급격히 확대되고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성화된 것은 억압의 약화 탓만이라 보긴 어렵고, 1차 대전 기간의 여성의 산업활동 등 복합적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식민지 지역에서 탄압이 약해진 경향이 있던 건 시대적 사조라고 보는 게 맞지 싶다. 한반도에서도 바로 이 시기가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기간이었다. 1919년 취임해 1927년까지 총독직을 맡았던 사이토 마코토는 재임기간 동안 일반경찰에 의한 식민지배를 시행했다. 통상 교과서에서는 이 시기 문화통치가 1919.3월 3.1운동의 여파로 인한 것이라 저술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세계사적으로도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완화된 식민지배를 경험했다. 식민제국들 자신이 새롭게 번지는 자유주의적 사조를 경험했고, 그 사람들이 식민기구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의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다. 패전국이 보유하던 식민지를 승전국이 재분배하면서, 위임/자치통치를 골간으로 하기로 논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최소한 외양에 있어서는 유화적 식민통치로 전환된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 다만, 1922년 남아공 반란 등에서도 알 수 있지만 현지 주민은 여전히 폭압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승전국 식민지에는 당초부터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흔히 퍼져있는 오해*와 달리 독일에게조차도 이 시기는 대체로 행복한 시기였다. 1차대전 패배와 그에 이은 베르사유 조약이 야기한 독일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오판이 겹쳐서, 20년대 초기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것이 사실이다. “식당을 들어설 때와 밥먹고 나올 때 가격이 달라서 메뉴판에 가격이 기재되지 않던”, 그리고 “아이들이 블록장난감보다는 저렴한 현찰뭉치를 쌓고 놀던” 초인플레이션은, 그러나 1924년경 종료되었다. 독일 뿐 아니라 초인플레이션을 함께 경험하던 4개국(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독일)은 1924년 일제히 초인플레이션의 종료를 경험하였고, 1924년부터는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독일어로는 이 시기를 Goldene Zwanziger라고 하는데 같은 의미이다. 1924년 미국에 의해 제안된 Dawes Plan에 의해 상당한 차관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연간 배상금 부담도 감소(총액은 유지)한 독일은 경제적 부흥을 경험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이 문화적 폭발을 함께 향유했다. 

 

 * 일부에서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득세하게 된 것이 이 시기 세계적 호황에 불구하고 독일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어서 그 반동으로 극단주의가 세를 얻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 독일이 침체를 겪은 것은 20년대 초반, 그리고 1929년 대공황 이후의 일이다. 나치당은 이 초인플레이션 기간(1919~1925)에 창당해 득세했고, 1923년 맥주홀 폭동까지 세를 얻었다. 그러나 맥주홀 폭동 실패로 히틀러는 투옥되었고(6개월간 복역하며 Mein Kampf를 저술했다) 나치당이 다시 확연히 세를 얻은 것은 세계대공황 이후인 1930년 9월 독일 총선에서 18%를 득표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런 호황은 다른 분야에서의 자유주의적 사조와 달리, 희한하게도 경건한 어떤 금제, 문화적 금기로 연결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가 금주법의 시기라는 점이 그러하다. 사실 금주법이라는 용어는 그 시절의 뉘앙스를 정확히 살리지 못한다. “금주헌법”의 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20부터 1933년의 기간은 Prohibition Era라고도 하는데, 종교적 경건성이 한 극단에 다달아 술 그 자체를 금지하는 규정을 “헌법”에 직접 규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글 최상단에 인용한 규정이 바로 그것인데, 미 수정헌법 제18조가 알콜의 금지를 규정한 내용이다. 이 규정은 1932년 대선에서 F.D.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개헌을 공약하고 나서 당선된 뒤에 비로소 없어질 수 있었는데 이것이 미 수정헌법 제21조의 내용이다. 1932년의 대선의 핵심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금주법이었다고 한다. 기독교 단체 등에서는 자경단을 구성하여 술을 마시거나 기타 불경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이들을 신고하고, 규제했다는 이야기마저 있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축적되었고 막대한 손해를 본 양조업자와, 무엇보다 농부들이 반발했다. 술을 허용하라는 입장을 갖는 반대단체가 급속도로 형성되었다. 게다가 밀주가 횡행했고, 오래된 창고 등에 있는 술들이 발굴되었다. 합법적으로 알코올을 판매할 수 있는 의사와 약사가 엄청난 부를 모을 수 있었는데, 그보다 더 큰 부를 모은 것이 마피아였다. 이 시기는 달리보면 마피아의 시기였는데, 이들은 경제호황보다는 이 금주헌법 덕분에 밀주를 만들며 부를 모을 수 있었다. 알카포네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1910년대 초반까지는 ‘모두가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술에 대한 규범적 금지를 이끌어낸 이 금주헌법은 자그마치 13년간이나 이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승리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이는 놀라운 이야기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술도 없이 이 광란의 20년대 문화적 폭발을 일궈냈다는 것이니까. 

 

 최근 일부에서는 2020년대가 1920년대 장기대호황이 반복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듯하다. 1920년대가 1차대전의 종료, 스페인독감의 종식, 그리고 2, 30년 전부터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의 고도화로 인해 장기적 호황을 누렸다는 분석을 토대로, 2020년대는 코로나19의 종식, IT 버블 이후 20여년간 다져온 제4차 산업혁명의 고도화가 새로운 장기호황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선 1920년대 호황이 낯선 주제인 만큼 관련하여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도록 작성해보았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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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는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지역이다. 자락이라고 하면 오해할 수 있는데, 소백산맥 한 복판의 길다란 계곡 같은 땅에 있는 마을이다. 아침에 칠봉산에서 해가 떠서, 저녁에 속리산으로 해가 진다.  

 산골 계곡 속 좁은 땅이다보니, 역사에 남은 위인을 배출한 바도 없고, 역사의 한 장면을 차지한 일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다. 마을회관에서부터 뒤로 널찍이 마을이 퍼져있다. 거의 모든 집이 슬레이트 지붕이고, 집마다 농기구를 두는 창고를 끼고 두 채, 혹은 세 채로 되어 있다. 그래도 보통 양옥 구조라,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 악천후에 비맞고 화장실 갈 일은 없다. 담벼락은 높지 않다. 없는 집도 많다. 동네 안쪽까지 시멘트, 혹은 아스팔트로 도로가 놓여있고, 수도와 전기도 잘 들어온다. 도시 못지 않다. 다만 큰 도로를 빼면, 다른 도로에는 차선이나 노면 표시는 없다. 농번기에는 도로도 온통 흙탕 범벅이 되지만, 배수로가 도로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어서 비만 오면 다시 길이 말끔해진다. 이 길을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오토바이를 몰고 지난다. 학교가 멀기 때문에 어른들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이젠 길이 놓였지만 예전엔 칠봉산을 넘어야 학교를 갈 수 있었다. 농사가 바쁠 때면 어른들에게 잡혀 농사일을 돕기도 하지만, 그래도 학교 일과시간은 보장받는다. 자기들 어릴 땐 학교고 뭐고 모내기 도왔다는 양념이 붙기는 하지만. 동네에 에쿠스며 그랜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보다는 트럭이 많고, 트럭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은 것은 그래서이다. 오히려 흙길을 밟기 힘들다. 논밭은 죄다 흙이지만, 길은 당연하다는 듯 시멘트다. 그래서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프고 관절이 시큰 거리기 마련이다. 시골마을이 노냥 그렇듯 마을 안에도 오르막이 있는데, 그 끝에 사는 아저씨네에 들르기라도 하면 내려오는 길엔 무릎이 뜨끈해진다. 

 이 곳 사람들은 거의 다 농사를 짓는다. 농작물은 다양하다. 옛날엔 논농사도 꽤 지었다고 하지만, 땅이 좁고 강이 멀어 원래 논농사에 맞지 않았다. 이제는 밭농사가 주력이다. 한때 전국에 1백여개소 밖에 없었을 시절부터 지어오던 오랜 고사리 밭이 이 마을에 있고, 주변에 복숭아며, 감을 재배하는 과수원도 곳곳에 퍼져있다. 오이며, 호박같은 채소도 조금씩은 어느 집에선가는 부쳐먹고 있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이 잔치라도 벌일 때면 채소가 모자랄 일은 없다. 땅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씨라도 뿌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여년 사이의 큰 변화라면 역시 마을 주민이 줄어드는 것이고, 휴경지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휴경지에 가득히 태양열발전판을 깔아두었고, 놀리는 것보다는 쏠쏠하게 돈을 버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평평한 땅에 깔아야 하는지라, 하필 금싸라기같은 마을 옆 땅에 가득히 펼쳐 있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는 어른들도 제법 있다.  

 예전엔 계절마다 잔칫거리가 있었다. 명절이 있고, 경조사가 있었다. 요즘엔 결혼도 없고, 누가 죽는 일도 적으며, 아기가 적어서 돌이며 백일도 없다. 명절도 이젠 못만나던 가족끼리 모여 보내지, 동리 단위로 보내지 않는다. 잔치를 벌일 일이 없다. 대신 물산이 더 풍부해졌다. 예전 같으면 잔칫날에나 먹었던 전이며 고깃국을 매일 해먹을 수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매일이 잔치지만, 달리 보면 잔치 벌일 일이 없다. 농번기가 끝나고 추수를 마치면 마을이 다 모여서 돼지를 잡기도 했는데, 이젠 비닐하우스 때문에 농한기라고 할 것이 없다. 겨울이 다가오면 마을 사람 마을회관에 모여 배추를 절이고 고추가루를 뿌려 김장을 담궈 나눠가졌는데, 기력이 쇠한 노인이 많아 모이는 이가 적어졌다. 그래도 아직 마을에서 김장을 함께 한다.  

 인터넷 환경이 좋다고는 못할 것이다. 안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 시골마을 정보화사업으로 인터넷은 깔렸는데, 농한기에 틈틈이 거기 적응하는 사이 어느새 세상은 3G며 LTE 중심으로 넘어가 버렸을 뿐이다. 회선은 깔려있으니 차라리 인터넷은 잘 되는데, 스마트폰은 영 어렵다. 흙 묻은 목장갑 위로 터치가 잘 되지도 않고, 밭마다 과수원마다 기지국을 깔긴 어렵기에 속도도 느리다. 사실 그 정도면 된다.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들은 거간이 황령리 사람들이고, 저녁이면 알아서 마을회관에 모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스마트폰으로 연락할 필요가 없다. 급한 일이 있으면 이장이 알아서 방송으로 이야기해준다. 또한, 어른들은 도회지에 나간 친척들과 영상통화를 할 때면 우선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에서야 영상을 켜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흙밥먹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은척면에 하나 뿐인 양조장에서 만드는 은척막걸리에 자부심을 느낀다. 어른들이 도회지에 나갈 때 대량으로 사들고 들어오지만, 양조장에서 트럭으로 마을회관마다 배달을 다니기도 한다. 예전엔 아이들이 나가서 사들고 오다가 마시는 일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먼 옛날의 이야기다. 농사를 짓다보면 참을 많이 먹고, 참을 먹을 땐 항상 막걸리를 곁들인다. 첫 참이 오전 10시 경에 있으니, 도시 사람들 기준으로는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셈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름엔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그리 이르기만 한 시간은 아닌 셈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같이 참을 먹고, 다 같이 트랙터를 몰고 오토바이를 달린다. 경찰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지만 오더라도 못본 척 하기 마련이다. 막걸리와 소주를 빼고 나면, 참은 거의 옥수수며 찐감자, 김치에 말아 내는 국수 같은 것이다. 과자나 초콜렛 같은 것은 보기 드물다. 편의점은 커녕 수퍼마켓도 10km는 족히 가야 나오기 때문에, 사오려면 큰 결심을 해야 한다. 다만 이장이 마을회관에 비품으로 과자며 사탕을 사다 두려고 하는 편이다. 나이가 몹시 많이 든 노인분들은 왠지 단 음식을 몹시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특별히 불편함을 모른다. 농민의 삶은 상거래보다는 직접 만들고 직접 해먹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해하는 것은 도시에 있다가 들어간 사람들 뿐이다.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은척면 밖의 다른 시골 마을들에서는 교회가 마을 한 가운데 있어서 중심을 잡아준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마을에서는 소식을 알리고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는 것도 목사 부부가 해줘서, 이장이 훨씬 편하다고도 하던데, 황령리에선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마을 밖에 따로 떨어져 있을 뿐더러, 다니는 이도 많지 않아 중심적인 역할로 보긴 어렵다. 그래도 목사님이 마을에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유일한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이 먼저 찾아가는 일은 많지 않지만, 목사가 마을을 돌다가 이런 저런 분쟁이며, 조언을 주는 일은 종종 있다. 마을 출신 사람은 아니지만, 목사의 말을 사람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듣는 편이다. 삼성전자에 다니다 온 엘리트라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목사님 없는 자리에서 칭찬하는 일도 빈번하다.  

 어린 아이들, 젊은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젊다고 오래 이장을 떠맡아야 했던 마을회관 옆집에 사는 아저씨네에는 20대 딸 셋이 있는데, 이젠 대구며 서울에 나가 살고, 명절에나 얼굴을 들이민다. 복숭아 농사를 짓던 아랫녘 할머니 댁에도 20대 아들이 있는데, 그래도 가까이 살아서인지 주말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가끔 번잡한 도시를 떠나 아이들을 키우러 오고 싶다는, 혹은 아이를 맡기고 싶다는 자녀들이 있기는 하지만, 초등학교조차 9km가 떨어진 이 황령리에 실제로 아이를 상시 둘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20대 아들딸들도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도회지의 친척집에 나가 살며 학교를 오갔다. 아이들은 아주 어리거나, 아니면 중학생 이상은 되는 나이대 밖에 없다. 그래서일지, 마을엔 놀이터가 없다. 예전엔 필요성을 몰랐고 지금은 필요성이 없어서 없다. 집마다 수저며 그릇이 사는 사람보다 몇 벌씩 더 있기 마련인데, 명절엔 자식들 가족을 위해 꺼내진다. 하지만 평소라고 광 속에 넣어두는 것은 아니다. 언제 옆집 사람이 불쑥 찾아와서 밥을 같이 먹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들도 무료하면 불쑥 옆집에 가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두끼까지도 하고 오곤 하기 때문에 그걸 불편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다만 잠은 반드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잔다. 이웃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것만은 무례라고 느낀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쭉 살아온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이걸 편하게 느끼진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들도 친구의 집에 찾아가 똑같이 행동한다. 

 외국인은 많지 않다. TV며 다른 지역 농민들 이야기를 들으면 온통 시집 온 외국인들이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시골 마을을 가득 채우고 사는 것 같은데, 황령리에는 외국인이 없다. 은척면을 다 뒤져봐도 14명이 고작이고, 그들이 낳은 자식도 11명이 전부다. 20개 리에 단 14명이면 많다고 할 일은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어떤 어른들은 외국인이 없어서 좋다고도 하지만, 외국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아무튼 1,508명이 살고 있는 지역이니까.   

 아프면 정말로 큰일이다. 그나마 한의원은 10km 안에 하나 있지만 병원은 26km를 달려야 비로소 하나 나오기 때문이다. 옛날엔 8km 떨어진 면사무소 근처에도 작은 병원이 하나 있었는데, 원장이 은퇴한 뒤로는 다시 병원이 생기질 못하고 있다. 보건소는 그래도 10km 안에 두 개나 있어서, 어디 아이가 넘어졌거나, 농사짓다 쟁기에라도 찔리거나 하면 마을 사람들은 보건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건소며 병원의 의사는 어지간한 병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항상 간단한 항생제와 진통제만 처방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도 큰 병이 걸린 것 같으면, 차라리 멀리 도회지로 나가서 진료를 받는다. 거리로는 대전이 가깝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대구에 더 친근함을 느끼는 것 같다. 큰 병이 났을 때 주로 찾아가는 병원도 대구의 대학병원들이기 때문이다. 

 의사보다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 공무원이다. 은척면 전체에 15명의 공무원만 있고 그나마 한명은 면장이고, 다른 하나는 출장소로 따로 떨어져나가 있다. 외국 출신 신부보다 공무원이 적다. 사실, 농가의 사람들은 공무원을 찾을 일이 없다. 담벼락도 자기들이 세우고, 하천도 자기들끼리 청소한다. 등본 같은 걸 뗄 일도 별로 없다. 검사며 판사같은 높은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만날 일이 없다. 경찰서는 커녕 순경 서너명이 근무하는 파출소도 10km 밖에 있다. 국회의원이나 상주시장 선거를 해도 후보들은 황령리를 스쳐지나갈 뿐, 차에서 내려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일이 없다. 농민들 특유의 자생적 근성이 합쳐져서, 공무원들을 매우 멀게 느낀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일은 없지만 설화는 있다. 유래가 깊은 동네마다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은척면은 예로부터 은척을 숨긴 땅이라고 알려져있다. 원래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은척과 금척, 두 가지 보물이 신라땅에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는 상주, 다른 하나는 경주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구가 너무 많이 늘었고 나랏님이 견디다못해 땅에 묻으라 했는데 그래서 상주시 은척면, 경주시 금척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다 하여 한때 경상감영을 경주에 두었다가, 다시 상주에 두어서, 그래서 경-상이라고 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 시절엔 은척면 황령리에도 곳곳까지 사람이 가득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황령리 사람들은 그 은척이 묻힌 곳을 칠봉산 바로 앞 은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산 이름이 그럴 리가 있냐는 것이다.  

 경북 상주시 은척면은 한국의 읍면동 중 소멸위험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고령인구를 분모로, 2, 30대 여성을 분자로 두고 산출한 "지방소멸위험지수"가 0.2 미만이면 소멸고위험군에 속하는데, 은척면은 그 수치가 0.03으로 한국 최저치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러하다.  

 2020년 의사 집단행동 사건 전후로 인터넷에 시골에 의사를 더 보내야 한다는 당위적 이야기가 많이 도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삶의 모습을 잘 아는 것 같진 않았다. 나도 모른다. 나도 인생의 87%를 동 지역에서 살았다. (군생활도 시골에 포함하면 도시생활 비율은 82%다)  

 흔히 지식인 집단으로 꼽히는 직업군에 속한 이들일 수록 도시에 사는 비율이 높은 듯 하다. 판검사며, 교사며, 고시 출신 공무원이며, 대학연구자, 언론사 기자, 대기업집단의 정규직 사원 등은 시골에 살 일이 없거나, 살게 되더라도 일시적이다. 그런데 일단 확인 가능한 통계에서, 의사는 예외이다. 의사는 약 4%가 읍이나 면지역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산다. 자세한 통계는 없지만, 읍면에서 활동하게된 의사들이 다시 대도시로 나와서 사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의사들은 의대 동기며 선후배들과의 연락망이 갖춰져있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시골의 삶에 대해 의사들은 제법 많은 정보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의사들이 지방에 가서 안쓰럽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의사들이 어쩌면 현대 한국에서 시골의 삶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지식인 집단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에 아래 링크의 글을 보았는데, 난 굉장히 호소력있다고 생각해서 의사 지인들에게 왜 의협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반응은 제법 의외였는데, 이미 여러번했고, 당연히 아는 이야기이며, 이것이 초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들에겐 이 정도 정보는 common sense에 가깝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이런 정도의 이야기로 국가 정책 방향이 바뀔 것은 아닐 것이고, 민의가 변할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반 대중들이 이런 걸 잘 아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역시, 모르는 종류의 이야기 - 예컨대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쉽게 강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좀 더 자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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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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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체증이 심한 도시의 교통정책으로 오히려 도로를 좁히고 주차공간을 줄이면 사람들이 차를 몰고 나오지 않아 교통체증이 줄어들 수 있다는 이론적 접근이 있다. 도로를 넓히고 주차를 쉽게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더 많이 차를 사고, 더 많이 개인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

 

산불이 나면 진화하지 말고 오히려 어느 정도 방치해 둬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은 산불들을 매번 다 끄니까 숲에 마른 낙엽이나 나뭇가지, 덤불들이 사라지지 않고 모여서, 나중엔 오히려 끌 수 없는 거대한 산불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의 산불은 큰 나무는 타지 않기 때문에 동물들이 숨을 수 있고, 잔 나무와 덤불이 타서 숲에 영양을 공급하지만, 그런 거대한 산불은 큰 나무마저 태우기 때문에 동물들도 죽게 만들고 흙 속의 씨앗까지 모두 죽인다는 논리이다.

 

직관과 정책이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자신의 가치를 창의력 면에서 증명하고 싶어하는 학자, 관료, 정치인들이 항시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간간히 그것이 진정 훌륭한 조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현대의 거시경제정책 그 자체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케인즈 전까지는 경기침체기의 정부재정도 적자를 최소화하자는 관점이 주류였다면, 그 이후에는 정부지출 확대가 대안이라는 관점이 주류가 되기도 했으니까.

 

영국과 일본 정부는 이번 COVID-19에 대해 꽤 직관과 다른 접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전염병 방역엔 초점을 두지 않고, 어느 정도 병이 퍼지게 두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전염성이 높은 병이라 막는 과정에서 의료인력과 자원이 과도하게 소요되어 중증 환자에게 투입되지 못하게 하고, 경제사회적으로 극심한 침체가 야기될 수 있다는 관점인 듯 하다. 아울러 전염병을 그냥 지연만 되게 하고 중증환자만 치료하면, 발병량 자체는 늘지 몰라도 막는 것보다는 의료자원을 절약하면서 조기에 종식할 수 있다는 논의로 보인다. 이게 옳은가? 한국에도 유사한 이야기를 하는 의료전문가가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일본 네티즌들은 이게 옳다고 믿는 것 같아 보인다. 난 판단이 안되는 분야니 일단은 그런가보다 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참고로, 도시계획을 할 때 정말로 도로를 좁히고 주차공간을 줄인 도시가 있다. 내가 그 도시에 사는데, 거의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이 도시는 대중교통이 부족하고, 도시가 청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으며, 가족단위 구성원이 많아 쇼핑 물량이 많은 등이 원인이라고 보인다. "직관과 어긋난 혁신적 대안"이란 게 항상 옳은 건 아니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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