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의 용광로는 두 달에 한번씩 정비를 위해 점검을 한다. 항시 용광로를 향해 불어넣어지는 고온, 초고압의 바람도 이때만은 멈춘다. 그렇지만 용광로 자체가 꺼지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불을 일부러 끄는 것은 아니며, 1500도에 달하는 쇳물 온도도 낮아지긴 할 지언정 어느 정도 유지된다. 용광로를 아예 끄면 어떻게 되는가? 제철업계 주장에 따르면, 용광로를 닫고 4~5일 경이 지나면 용광로가 사실상 정지된다고 한다. 이 경우, 용광로를 재가동하려면 5개월 여가 걸리며, 용광로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 안에서 녹아있던 쇳물이며 체계적으로 쌓아둔 코크스, 소결광 등이 용광로 벽에 눌러붙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철소는 수요 감소가 있다고 해도 용광로를 쉽게 끌 수 없다.

 

경기 침체라는 건 생각해보면 희한한 현상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건물이 있고, 기계장비가 있으며, 여전히 원재료가 있고, 숙련이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 있다. 모든 실물이 그대로인데, 주가는 폭락해 기업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경제가 돌아가지도 않는 것이 불황이다. 작금의 위기는 그래도 어제와 다른 상황 (전염병 위기)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더 이해가능성이 높은 위기이긴 하다. 대신, 생산능력 자체가 하락한 상황(노동공급이 단절)이기 때문에 해결도 더욱 어렵다는 것이 한계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도 계속 돌아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 이야기한 철강업이 대표적인데, 현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면 미래의 경기회복에 대비해 제철 능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당장의 손실에 불구하고 용광로를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끄면 다시 켜는데 너무 오래걸리니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곳곳을 뒤져보면 이런 산업이 더 있을 것이고 그런 걸 찾아내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에 덧붙여 업종 자체가 특별한 고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농업이다. 농업은 업종 전체가 사실상 "특정 시기"를 놓치면 짧게는 3~4개월에서 길게는 1년치 산출물이 급감하는 성질을 갖는다. 예컨대 벼농사에서 4월은 파종기인데, 만에 하나 이 시기에 농촌까지 코로나-19가 퍼져 농사에 지장이 있다면 금년 쌀 산출은 급감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농촌은 인구밀도가 낮고, 농가별 동선 등이 겹치는 일이 (기업 사무직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비교적 정상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수확기이다. 수확기에는 인근지역 거주 노인, 외국인 노동자(고용허가제), 계절근로(방문), 등이 투입되어 농사일이 진행되는데, 이런 인력의 유입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이 수확기인 양배추 등 야채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의외로 상당할 수 있다. 경기 침체 상황에 엉뚱하게 식자재 가격 상승이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총공급 충격 시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쳤을 때 나올 수 있는 부작용과 별개로) 1국에 닥친 위기라면 해외 농산물 수입으로 해결할 수도 있긴 할 것인데, 지금이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도 의문이고.

그런 걸 고려할 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농업에 인력을 투입할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Posted by Chloey
,

1990년 초 일본 경제를 총괄하는 대장성은 매년 10% 이상 오르던 일본 전역의 부동산 가격이 심지어 16.7% 더 올랐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전년 대비 주택가격 68.6% 상승이라는 기록을 보인 `88년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대장성이 `89년 한해 동안 여러차례 정책금리를 높이면서 세금도 높여왔음에도 여전히 잡히질 않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88년까지 1%대에 달하던 정책금리는 `90년 초에는 이미 5%에 다다르고 있었다.

 

부동산도 기본적으로 자산인만큼 수요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동하는 것이다. 다만 부동산은 수요(매년 새롭게 집을 장만하려는 사람만 실수요자로 치더라도)에 비해 '좋은 위치의 공급'은 적은 특성이 있다. 정책적으로 신규 물량을 아무리 공급하더라도(=신도시를 짓더라도) 기본적으로 '덜 좋은 위치의 공급'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때문에 경제성장기에는 대체로 가격도 함께 오르는 법이다.

 

그런데 일본의 당시 상황은 그렇게 설명할 것이 아니었다. 이 당시 일본은 미국과의 무역 분쟁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외교안보적으로 강하게 일본을 압박했고, 엔화가치를 올리라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85년 플라자 합의로 이어졌고, 인위적으로 엔화 가치가 높아졌다. `86년에는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강력한 금리 인하와 거대한 규모의 공공투자를 계획해야 하였다. `85년 플라자 합의 시점에서 GDP가 약 1,500조원 수준이던 일본은 `91년부터 공공개발사업에 10년간 3,50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고 이것이 경기 팽창에 대한 기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투기가 팽창되기 시작했고,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부호가 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고, 사람들은 높아진 부동산 가격을 배경으로 더 큰 액수의 담보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다시 구매하였다.

 

일본 엔화가치 상승은 무역감소로 연결될 것이고 그것이 경기침체로 다가올 것은 자명했지만, 눈 앞의 자산가격 상승이 사람들의 눈을 흐렸다. 이 시점에서 부동산 열풍은 광기로 변해서 일본 전역에 리조트며, 호화주택을 지어대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85년 전체 대출의 7.5%에 불과하던 부동산 대출은 `89년 시점에는 10.7%에 달하고 있었다. 총량 자체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다. `85년 금융기관의 부동산대출 총액은 200,917억엔이었는데 `89.12월에는 469,019억엔으로 4년만에 2배 이상 높아져 있었다. 금융기관 외의 대출(개인간 대출 등)을 고려하면 문제는 훨씬 심각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난 부동산 자산을 바탕으로, 기업과 개인들은 막대한 대출을 뽑아내어 미국의 부동산과 기업을 사고 있었다. 일본인이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록펠러센터를 비롯한 랜드마크들을 줄줄이 구매했고, 각종 영화사 등 주요 기업도 연이어 구매했다. 일본 각지의 미술관, 박물관에 깔려있는 피카소며 고흐의 미술품도 이때 대거 구매된 것이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농담이 횡행했다. 일왕이 사는 집 (일본 내부에서 이른바 '皇居'라고 하는 곳)의 추정 지가가 LA 전체 지가보다 높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건 국가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첫째로 일본의 경제적 역량이 너무 과도하게 부동산에 쏠리고 있었다. 금융자산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투자나 연구 등에 투입되어야 경제 생산성을 지속 개선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개인이나 기업 관점에서는 부(wealth)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지만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별다른 효율성 개선을 가져오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 시점 일본은 '미래를 차입해서 지금 부유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둘째로 일본 서민들의 불만이 위험수준까지 증가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부동산을 갖고 있던 자들과 아닌 자들 간의 자산 격차가 너무 커졌고,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해진 서민들은 강한 불신감을 국가와 사회에 보이기 시작했다.

 

셋째로, 일해서 저축하여 돈을 모으는 것에 대한 경시와 경멸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당시 물가상승율은 2~3% 수준이었고 엔고로 인해 임금의 구매력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론과 주변에서 온통 부동산으로 수천만엔, 수억엔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임금이나 저축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졌다고 인식되던 것이었다.

 

넷째로, 지방과 도시 간 격차가 너무 커지고 있었다. 이런 땅값 상승도 농촌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의 빌딩 한채가 시골의 한 현의 땅값에 맞먹는다는 농담마저 돌기도 했다. 자연히 지방에서는 도시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다섯째로, 정책에 대한 불신이 너무 심해지고 있었다. 대장성이며 국토청은 이미 `86년부터 부동산 가격 잡기에 나섰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여섯째로, 금융 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부동산가격은 오르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는 은행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대출은 은행의 전체 대출의 10% 수준이긴 했지만, 대출 건건을 보면 상황이 달랐다. `85년까지 은행은 부동산 가격이 1억엔이면 6천만엔 정도만 대출해줬었다. `90년에는 1억엔짜리 부동산에 1억2천만엔까지 대출하고 있었다. 부동산이 당연히 오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정부 내에도 이미 저금리와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이 문제라는 인식은 있었다. 허나 플라자합의로 인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더 컸고, 따라서 부동산 폭등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한동안 금리를 높이진 못했다. 오히려 국토청이 부동산 단기차익에 중과세를 부과하기로 한 직후에 대장성이 금리를 0.25%p 낮춘 사례도 있었다. 초기에만 해도 대장성은 부동산보다 경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라자 합의 등 연이은 미국의 통상압력의 결과가 오히려 미국의 기업과 부동산 구매로 이어진 상황이 주는 우월감도 일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여하튼 부동산은 `88년부터는 이미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부동산에 쏠리는 유동성만이라도 줄이자고 대장성은 실수요자 중심으로만 대출해주도록 은행에 협조를 요청하고, 조사, 지도도 실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은행의 이윤추구 성향을 막을 수 없었고, 막대한 물량(그것도 급격히 늘어나는)의 대출을 하나하나 심사할 방법도 없었다. 대장성과 국토청은 세금 인상으로 대응했다. 사실 세금 인상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버블 대책은 근본적으로 유동성 감소와 금리 인상이어야 하는데 이는 경기침체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택하기 힘들었다. 반면 세금 정책은 ① 문제가 된 자산 유형에만 원포인트로 적용될 수 있고, ② 전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며, ③ (재정관료들이 항상 걱정하는) 재정건전성 개선에도 유리했다. 이에 당시 일본은 보유세와 양도세를 모두 대폭 인상하였다. 덧붙여 공시지가도 크게 현실화하였는데, 사실상 세금 인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문제는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부동산은 몇천만엔, 몇억엔이 오르고 있었으며 가격의 120%가 대출되는 상황이었다. 세금을 아무리 높여도 번 돈의 100% 이상을 징세할 수 없는 이상 돈은 여전히 부동산으로 쏠렸다. 이 지경으로 가다보니 국토청 내부에서는 대장성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동성을 늘리고 금리를 낮춰 문제를 만든 건 대장성인데, 그런 원인 해소는 없이 사후적인 정책수단만 갖춘 국토청만 쪼고 있다는 식이다. 국토청은 공급 확대를 위해 대규모 택지개발 계획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었는데, 택지개발구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 택지개발에 따른 유동성 추가공급 등이 다시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기까지 해서, 그런 우려가 없는 도쿄만 매립계획 같은 대책마저 발표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지가상승감시구역' 제도도 도입해 관리하고 있었으나, `90년 초에 이르면 사실상 전국의 모든 도시지역이 이 '감시구역'에 해당하고 있어서 행정력의 한계마저 겪고 있었다. 국토청은 대장성을 더 강하게 압박하였다. 아마도 국회와 언론에서도 대장성을 압박했을 것이다.

 

결국 대장성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문제의 원인이 유동성이면 금리를 높이고 유동성을 제거해야 했다. 은행이 부동산에 덜 개입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89년부터 `90년까지 일본은행을 통해 총 5번 금리를 높여 2.5%이던 일본은행 정책금리를 6%까지 높였다. 덧붙여 시장의 금융기관들에게 대장성 은행국장의 명의로 서신을 보냈다. 부동산 대출증가율을 총대출증가율 범위 이하로 낮추고, 대출 실태를 모두 보고하라는 요구였다. 이것이 바로 '부동산 융자 총량 규제 不動産 關聯 融資總量 規制'였다. 이 통지에 따라 은행들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던 부동산 대출상황을 고려,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일시적으로 부동산 대출을 사실상 중단했다.

 

효과는 강력했다. 새로운 수요의 싹이 잘린 것이다. 엄청난 자산을 자랑하는 기업과 개인들조차도 그 재산의 대부분은 부동산과 주식의 형태였고, 새로운 부동산을 사려면 담보로 차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차입을 막았고, 돌아오는 어음 환수나 세금 납부를 위한 급매는 나오기 마련이며, '공급이 작아서 생기는 가격 급등'현상이 급속도로 실종되었다. 사실, 효과가 너무 강력했다. 가격 급등이 실종된 것에 멈추지 않고 가격 급락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부도 위기에 처한 자들이 급매물의 가격을 계속해서 낮춰서 팔려고 했지만 대출이 없어서 그런 가격에도 팔리지 않은 것이다.

 

대장성도 이럴 우려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던 것 같다. 주전住專이라고 불리는 주택금융전문회사(2금융권에 속한다)와 농협의 부동산담보대출은 애초에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락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둔 것이라고 할 것인데, 부동산 급락은 막지 못하면서 오히려 폭발은 키우는 장치가 되어버렸다. 대출총량 규제에서 제외된 탓에 대출 수요가 주전으로 몰려든 것이다. 주전의 대출총액은 `90년만 해도 3조엔 규모였는데, `95년이 되면 11조엔에 이르는 규모로 팽창했다. 그럼에도 부동산 급락은 막지 못했고 (당초 금융기관의 부동산 대출 '증가액'만 연간 수조엔 규모였던 걸 고려하자), 급락으로 금융기관의 담보들이 부실화되면서 대장성 권고를 철회(`91년 12월경)한 후에도 금융기관들이 대출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주전의 대출만으로는 충분한 대출물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버블은 호랑이를 탄 기세와 같아서, 일단 멈추면 그대로 위기로 전환되는 법이다. 주전의 대출 중 8조엔이 불량으로 판단되었고, 그 중 5조엔은 어떻게 해도 부실채권으로 남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일본 사회의 뇌관이 되어버렸다는 평가가 내려졌고, 대장성이 매 순간마다 판단을 그르쳤다는 일본 사회의 담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약 1천년간 유지된 '대장성'은 '재무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주요 관료들이 검찰에 입건되는 신세가 되었다. 예산권도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빼앗겼고, 금융감독권은 금융감독청을 신설해서 넘겼다. 재무성에는 재정정책기능만 남게 되었다.

 

책임있는 관료들은 문책했지만, 상황이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장기불황이 시작했다. 자산의 압도적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이 팔리지 않고, 팔려도 급락한 가격으로만 거래되기 때문에, 그리고 대출액은 여전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부실화되어 버렸다. '월급 모아서는 살 수 없는 부동산 가격'은 이제는 '월급 모아서는 갚을 수 없는 대출'로 변해버렸다.

 

`90년대 당시 국토청에 있던 관료들의 이야기를 보면 부동산 버블기 정책에서 결국 관건은 기존 물량이 적절히 시중에 흘러나올 수 있게(공급관리) 하면서, 투기성 수요를 저감하는(수요관리) 금리나 유동성 관리를 해주는 것이 관건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서 금융기관에 남는 유동성을 정부가 흡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거래를 제한하더라도 실수요자는 있기 마련이므로, 적은 공급량이 오히려 가격 급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이 '경제지리' 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신규 물량을 아무리 공급해도 그건 외곽지역의 이야기이기 쉽고, 외곽지역의 부동산이 흔해지니 반대로 코어지역에 더 수요가 쏠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한국으로 치면 강남 부동산가격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Posted by Chloey
,

세입자가 최소한 1회는 임대계약을 갱신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경우 임대비 상승폭도 5% 이내로 제한하는 법률이 재산권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법률에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침해에 해당하지 않으려면 본질적 부분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 부분에 대한 논의가 있는 모양인데, 본질적 부분에 대한 침해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번 법개정 특성상 조만간 누군가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할테니 헌재의 판단이 나올 것이고, 좀 다른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 제13조 ②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을 받거나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제37조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행위 중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있는 것이 토지조사사업이다. 당시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 위해 진행되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한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연계되어서 조선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땅을 주기 위한 정책들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다만 이는 초기의 연구 등에서 주로 주장되던 논의였고, 근자에는 말 그대로 소유권을 조작한 사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히려 근래의 연구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이 다른 맥락에서 수탈적이었다고 주장되고 있는데 바로 '소작권'의 부정이다.

 

조선시대까지는 토지에 대한 재산권은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먼저 산의 소유는 대체로 금지되어 있었다(「경국대전주해」 형전 추관사구 금제, 「추관지」 등). 논 밭의 경우에는 당연히 소유권이 있었는데, 여기에 관습적으로 도지권 賭地權이 인정되었다. 도지권이란 '그 땅을 사용할 권리'로 요약할 수 있는데, 작물을 무얼 심고, 토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을 정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였다. 도지권은 토지소유권자가 토지를 매매나 증여해도 소멸되지 않았으며, 도지권 자체도 상속하거나 거래하는 경우마저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은 소유권과 사용권의 병합이며, 부동산임대계약은 일정 기간 동안의 사용권의 제공이라고 본다면 조선시대에는 부동산 재산권 자체가 이분화되어 있던 셈이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으로 일제가 전국 토지를 조사하면서 이 구조를 바꿨다는 것이 문제였다. 첫번째로 임야의 소유권을 정해줬다. 무주공산은 국유지로 편입했고, 특정 가문이 선산으로 사실상 관리되던 산은 그 가문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두번째로 소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토지소유권을 일원화하여 이른바 일물일권 一物一權을 실현했는데, 이에 따라 일본인이 안정적으로 지주로부터 토지를 구입하여 임의로 소작인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 소작인들은 사실상 매년 소작계약을 갱신해야 했고, 경제적 상황이 보다 불안정하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서 일제에 의한 수탈이 용이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한반도의 토지가 자본화 capitalization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에르난도 데 소토 hernando de soto의 「자본의 미스터리 - 왜 자본주의는 서구에서만 성공했는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맹아기에 반드시 필요한 건 일종의 유동화한 자산 Asset Securitization, 즉 자본이다. 생산체계 확충 등에 투입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자본이 필요한데, 서구든 비서구든 전근대에 이미 방대한 양의 자산(특히 부동산)이 존재하고 있지만 법제도적으로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를 동원할 수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서구지역에는 자산의 소유권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으로서의 법제도가 아예 없거나, 혹은 하나의 자산에 다층적인 권리가 동시에 존재해서 거래 가치가 사실상 없어서 자본화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에는 어떤 의미로는 일물일권 一物一權적 방식의 재산권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가 있다, 라고는 할 수 있지 싶다.

 

그런데 현대 대한민국 수준의 경제상황을 갖춘 사회에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주택 시가총액은 약 5,056조원(`19년 기준)이고, 전체 국부 National Wealth는 1경 6,621억원 규모다. 주택 자산으로 대표되는 부동산의 다층적 재산권화로 인해 자본화가 설령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그 외의 자산 규모가 이미 적잖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미 2년 관행으로 이뤄지고 있던 부동산임대계약을 4년으로 하는 것이 본질적 부분을 훼손하는 것인지 의문이 있는 점, 부동산 거래를 제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경제성장에 따른 이익을 부동산 소유주가 대부분 가져가는 것이 위험감수자가 이익을 가져야 한다는 '자본주의 원칙'과는 상이한 점이 많다는 주장도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꼭 내가 세입자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Posted by Chlo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