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는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지역이다. 자락이라고 하면 오해할 수 있는데, 소백산맥 한 복판의 길다란 계곡 같은 땅에 있는 마을이다. 아침에 칠봉산에서 해가 떠서, 저녁에 속리산으로 해가 진다.  

 산골 계곡 속 좁은 땅이다보니, 역사에 남은 위인을 배출한 바도 없고, 역사의 한 장면을 차지한 일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다. 마을회관에서부터 뒤로 널찍이 마을이 퍼져있다. 거의 모든 집이 슬레이트 지붕이고, 집마다 농기구를 두는 창고를 끼고 두 채, 혹은 세 채로 되어 있다. 그래도 보통 양옥 구조라,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 악천후에 비맞고 화장실 갈 일은 없다. 담벼락은 높지 않다. 없는 집도 많다. 동네 안쪽까지 시멘트, 혹은 아스팔트로 도로가 놓여있고, 수도와 전기도 잘 들어온다. 도시 못지 않다. 다만 큰 도로를 빼면, 다른 도로에는 차선이나 노면 표시는 없다. 농번기에는 도로도 온통 흙탕 범벅이 되지만, 배수로가 도로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어서 비만 오면 다시 길이 말끔해진다. 이 길을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오토바이를 몰고 지난다. 학교가 멀기 때문에 어른들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이젠 길이 놓였지만 예전엔 칠봉산을 넘어야 학교를 갈 수 있었다. 농사가 바쁠 때면 어른들에게 잡혀 농사일을 돕기도 하지만, 그래도 학교 일과시간은 보장받는다. 자기들 어릴 땐 학교고 뭐고 모내기 도왔다는 양념이 붙기는 하지만. 동네에 에쿠스며 그랜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보다는 트럭이 많고, 트럭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은 것은 그래서이다. 오히려 흙길을 밟기 힘들다. 논밭은 죄다 흙이지만, 길은 당연하다는 듯 시멘트다. 그래서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프고 관절이 시큰 거리기 마련이다. 시골마을이 노냥 그렇듯 마을 안에도 오르막이 있는데, 그 끝에 사는 아저씨네에 들르기라도 하면 내려오는 길엔 무릎이 뜨끈해진다. 

 이 곳 사람들은 거의 다 농사를 짓는다. 농작물은 다양하다. 옛날엔 논농사도 꽤 지었다고 하지만, 땅이 좁고 강이 멀어 원래 논농사에 맞지 않았다. 이제는 밭농사가 주력이다. 한때 전국에 1백여개소 밖에 없었을 시절부터 지어오던 오랜 고사리 밭이 이 마을에 있고, 주변에 복숭아며, 감을 재배하는 과수원도 곳곳에 퍼져있다. 오이며, 호박같은 채소도 조금씩은 어느 집에선가는 부쳐먹고 있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이 잔치라도 벌일 때면 채소가 모자랄 일은 없다. 땅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씨라도 뿌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여년 사이의 큰 변화라면 역시 마을 주민이 줄어드는 것이고, 휴경지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휴경지에 가득히 태양열발전판을 깔아두었고, 놀리는 것보다는 쏠쏠하게 돈을 버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평평한 땅에 깔아야 하는지라, 하필 금싸라기같은 마을 옆 땅에 가득히 펼쳐 있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는 어른들도 제법 있다.  

 예전엔 계절마다 잔칫거리가 있었다. 명절이 있고, 경조사가 있었다. 요즘엔 결혼도 없고, 누가 죽는 일도 적으며, 아기가 적어서 돌이며 백일도 없다. 명절도 이젠 못만나던 가족끼리 모여 보내지, 동리 단위로 보내지 않는다. 잔치를 벌일 일이 없다. 대신 물산이 더 풍부해졌다. 예전 같으면 잔칫날에나 먹었던 전이며 고깃국을 매일 해먹을 수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매일이 잔치지만, 달리 보면 잔치 벌일 일이 없다. 농번기가 끝나고 추수를 마치면 마을이 다 모여서 돼지를 잡기도 했는데, 이젠 비닐하우스 때문에 농한기라고 할 것이 없다. 겨울이 다가오면 마을 사람 마을회관에 모여 배추를 절이고 고추가루를 뿌려 김장을 담궈 나눠가졌는데, 기력이 쇠한 노인이 많아 모이는 이가 적어졌다. 그래도 아직 마을에서 김장을 함께 한다.  

 인터넷 환경이 좋다고는 못할 것이다. 안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 시골마을 정보화사업으로 인터넷은 깔렸는데, 농한기에 틈틈이 거기 적응하는 사이 어느새 세상은 3G며 LTE 중심으로 넘어가 버렸을 뿐이다. 회선은 깔려있으니 차라리 인터넷은 잘 되는데, 스마트폰은 영 어렵다. 흙 묻은 목장갑 위로 터치가 잘 되지도 않고, 밭마다 과수원마다 기지국을 깔긴 어렵기에 속도도 느리다. 사실 그 정도면 된다.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들은 거간이 황령리 사람들이고, 저녁이면 알아서 마을회관에 모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스마트폰으로 연락할 필요가 없다. 급한 일이 있으면 이장이 알아서 방송으로 이야기해준다. 또한, 어른들은 도회지에 나간 친척들과 영상통화를 할 때면 우선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에서야 영상을 켜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흙밥먹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은척면에 하나 뿐인 양조장에서 만드는 은척막걸리에 자부심을 느낀다. 어른들이 도회지에 나갈 때 대량으로 사들고 들어오지만, 양조장에서 트럭으로 마을회관마다 배달을 다니기도 한다. 예전엔 아이들이 나가서 사들고 오다가 마시는 일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먼 옛날의 이야기다. 농사를 짓다보면 참을 많이 먹고, 참을 먹을 땐 항상 막걸리를 곁들인다. 첫 참이 오전 10시 경에 있으니, 도시 사람들 기준으로는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셈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름엔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그리 이르기만 한 시간은 아닌 셈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같이 참을 먹고, 다 같이 트랙터를 몰고 오토바이를 달린다. 경찰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지만 오더라도 못본 척 하기 마련이다. 막걸리와 소주를 빼고 나면, 참은 거의 옥수수며 찐감자, 김치에 말아 내는 국수 같은 것이다. 과자나 초콜렛 같은 것은 보기 드물다. 편의점은 커녕 수퍼마켓도 10km는 족히 가야 나오기 때문에, 사오려면 큰 결심을 해야 한다. 다만 이장이 마을회관에 비품으로 과자며 사탕을 사다 두려고 하는 편이다. 나이가 몹시 많이 든 노인분들은 왠지 단 음식을 몹시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특별히 불편함을 모른다. 농민의 삶은 상거래보다는 직접 만들고 직접 해먹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해하는 것은 도시에 있다가 들어간 사람들 뿐이다.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은척면 밖의 다른 시골 마을들에서는 교회가 마을 한 가운데 있어서 중심을 잡아준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마을에서는 소식을 알리고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는 것도 목사 부부가 해줘서, 이장이 훨씬 편하다고도 하던데, 황령리에선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마을 밖에 따로 떨어져 있을 뿐더러, 다니는 이도 많지 않아 중심적인 역할로 보긴 어렵다. 그래도 목사님이 마을에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유일한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이 먼저 찾아가는 일은 많지 않지만, 목사가 마을을 돌다가 이런 저런 분쟁이며, 조언을 주는 일은 종종 있다. 마을 출신 사람은 아니지만, 목사의 말을 사람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듣는 편이다. 삼성전자에 다니다 온 엘리트라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목사님 없는 자리에서 칭찬하는 일도 빈번하다.  

 어린 아이들, 젊은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젊다고 오래 이장을 떠맡아야 했던 마을회관 옆집에 사는 아저씨네에는 20대 딸 셋이 있는데, 이젠 대구며 서울에 나가 살고, 명절에나 얼굴을 들이민다. 복숭아 농사를 짓던 아랫녘 할머니 댁에도 20대 아들이 있는데, 그래도 가까이 살아서인지 주말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가끔 번잡한 도시를 떠나 아이들을 키우러 오고 싶다는, 혹은 아이를 맡기고 싶다는 자녀들이 있기는 하지만, 초등학교조차 9km가 떨어진 이 황령리에 실제로 아이를 상시 둘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20대 아들딸들도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도회지의 친척집에 나가 살며 학교를 오갔다. 아이들은 아주 어리거나, 아니면 중학생 이상은 되는 나이대 밖에 없다. 그래서일지, 마을엔 놀이터가 없다. 예전엔 필요성을 몰랐고 지금은 필요성이 없어서 없다. 집마다 수저며 그릇이 사는 사람보다 몇 벌씩 더 있기 마련인데, 명절엔 자식들 가족을 위해 꺼내진다. 하지만 평소라고 광 속에 넣어두는 것은 아니다. 언제 옆집 사람이 불쑥 찾아와서 밥을 같이 먹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들도 무료하면 불쑥 옆집에 가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두끼까지도 하고 오곤 하기 때문에 그걸 불편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다만 잠은 반드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잔다. 이웃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것만은 무례라고 느낀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쭉 살아온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이걸 편하게 느끼진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들도 친구의 집에 찾아가 똑같이 행동한다. 

 외국인은 많지 않다. TV며 다른 지역 농민들 이야기를 들으면 온통 시집 온 외국인들이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시골 마을을 가득 채우고 사는 것 같은데, 황령리에는 외국인이 없다. 은척면을 다 뒤져봐도 14명이 고작이고, 그들이 낳은 자식도 11명이 전부다. 20개 리에 단 14명이면 많다고 할 일은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어떤 어른들은 외국인이 없어서 좋다고도 하지만, 외국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아무튼 1,508명이 살고 있는 지역이니까.   

 아프면 정말로 큰일이다. 그나마 한의원은 10km 안에 하나 있지만 병원은 26km를 달려야 비로소 하나 나오기 때문이다. 옛날엔 8km 떨어진 면사무소 근처에도 작은 병원이 하나 있었는데, 원장이 은퇴한 뒤로는 다시 병원이 생기질 못하고 있다. 보건소는 그래도 10km 안에 두 개나 있어서, 어디 아이가 넘어졌거나, 농사짓다 쟁기에라도 찔리거나 하면 마을 사람들은 보건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건소며 병원의 의사는 어지간한 병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항상 간단한 항생제와 진통제만 처방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도 큰 병이 걸린 것 같으면, 차라리 멀리 도회지로 나가서 진료를 받는다. 거리로는 대전이 가깝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대구에 더 친근함을 느끼는 것 같다. 큰 병이 났을 때 주로 찾아가는 병원도 대구의 대학병원들이기 때문이다. 

 의사보다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 공무원이다. 은척면 전체에 15명의 공무원만 있고 그나마 한명은 면장이고, 다른 하나는 출장소로 따로 떨어져나가 있다. 외국 출신 신부보다 공무원이 적다. 사실, 농가의 사람들은 공무원을 찾을 일이 없다. 담벼락도 자기들이 세우고, 하천도 자기들끼리 청소한다. 등본 같은 걸 뗄 일도 별로 없다. 검사며 판사같은 높은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만날 일이 없다. 경찰서는 커녕 순경 서너명이 근무하는 파출소도 10km 밖에 있다. 국회의원이나 상주시장 선거를 해도 후보들은 황령리를 스쳐지나갈 뿐, 차에서 내려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일이 없다. 농민들 특유의 자생적 근성이 합쳐져서, 공무원들을 매우 멀게 느낀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일은 없지만 설화는 있다. 유래가 깊은 동네마다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은척면은 예로부터 은척을 숨긴 땅이라고 알려져있다. 원래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은척과 금척, 두 가지 보물이 신라땅에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는 상주, 다른 하나는 경주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구가 너무 많이 늘었고 나랏님이 견디다못해 땅에 묻으라 했는데 그래서 상주시 은척면, 경주시 금척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다 하여 한때 경상감영을 경주에 두었다가, 다시 상주에 두어서, 그래서 경-상이라고 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 시절엔 은척면 황령리에도 곳곳까지 사람이 가득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황령리 사람들은 그 은척이 묻힌 곳을 칠봉산 바로 앞 은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산 이름이 그럴 리가 있냐는 것이다.  

 경북 상주시 은척면은 한국의 읍면동 중 소멸위험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고령인구를 분모로, 2, 30대 여성을 분자로 두고 산출한 "지방소멸위험지수"가 0.2 미만이면 소멸고위험군에 속하는데, 은척면은 그 수치가 0.03으로 한국 최저치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러하다.  

 2020년 의사 집단행동 사건 전후로 인터넷에 시골에 의사를 더 보내야 한다는 당위적 이야기가 많이 도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삶의 모습을 잘 아는 것 같진 않았다. 나도 모른다. 나도 인생의 87%를 동 지역에서 살았다. (군생활도 시골에 포함하면 도시생활 비율은 82%다)  

 흔히 지식인 집단으로 꼽히는 직업군에 속한 이들일 수록 도시에 사는 비율이 높은 듯 하다. 판검사며, 교사며, 고시 출신 공무원이며, 대학연구자, 언론사 기자, 대기업집단의 정규직 사원 등은 시골에 살 일이 없거나, 살게 되더라도 일시적이다. 그런데 일단 확인 가능한 통계에서, 의사는 예외이다. 의사는 약 4%가 읍이나 면지역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산다. 자세한 통계는 없지만, 읍면에서 활동하게된 의사들이 다시 대도시로 나와서 사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의사들은 의대 동기며 선후배들과의 연락망이 갖춰져있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시골의 삶에 대해 의사들은 제법 많은 정보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의사들이 지방에 가서 안쓰럽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의사들이 어쩌면 현대 한국에서 시골의 삶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지식인 집단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에 아래 링크의 글을 보았는데, 난 굉장히 호소력있다고 생각해서 의사 지인들에게 왜 의협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반응은 제법 의외였는데, 이미 여러번했고, 당연히 아는 이야기이며, 이것이 초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들에겐 이 정도 정보는 common sense에 가깝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이런 정도의 이야기로 국가 정책 방향이 바뀔 것은 아닐 것이고, 민의가 변할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반 대중들이 이런 걸 잘 아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역시, 모르는 종류의 이야기 - 예컨대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쉽게 강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좀 더 자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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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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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체증이 심한 도시의 교통정책으로 오히려 도로를 좁히고 주차공간을 줄이면 사람들이 차를 몰고 나오지 않아 교통체증이 줄어들 수 있다는 이론적 접근이 있다. 도로를 넓히고 주차를 쉽게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더 많이 차를 사고, 더 많이 개인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

 

산불이 나면 진화하지 말고 오히려 어느 정도 방치해 둬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은 산불들을 매번 다 끄니까 숲에 마른 낙엽이나 나뭇가지, 덤불들이 사라지지 않고 모여서, 나중엔 오히려 끌 수 없는 거대한 산불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의 산불은 큰 나무는 타지 않기 때문에 동물들이 숨을 수 있고, 잔 나무와 덤불이 타서 숲에 영양을 공급하지만, 그런 거대한 산불은 큰 나무마저 태우기 때문에 동물들도 죽게 만들고 흙 속의 씨앗까지 모두 죽인다는 논리이다.

 

직관과 정책이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자신의 가치를 창의력 면에서 증명하고 싶어하는 학자, 관료, 정치인들이 항시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간간히 그것이 진정 훌륭한 조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현대의 거시경제정책 그 자체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케인즈 전까지는 경기침체기의 정부재정도 적자를 최소화하자는 관점이 주류였다면, 그 이후에는 정부지출 확대가 대안이라는 관점이 주류가 되기도 했으니까.

 

영국과 일본 정부는 이번 COVID-19에 대해 꽤 직관과 다른 접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전염병 방역엔 초점을 두지 않고, 어느 정도 병이 퍼지게 두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전염성이 높은 병이라 막는 과정에서 의료인력과 자원이 과도하게 소요되어 중증 환자에게 투입되지 못하게 하고, 경제사회적으로 극심한 침체가 야기될 수 있다는 관점인 듯 하다. 아울러 전염병을 그냥 지연만 되게 하고 중증환자만 치료하면, 발병량 자체는 늘지 몰라도 막는 것보다는 의료자원을 절약하면서 조기에 종식할 수 있다는 논의로 보인다. 이게 옳은가? 한국에도 유사한 이야기를 하는 의료전문가가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일본 네티즌들은 이게 옳다고 믿는 것 같아 보인다. 난 판단이 안되는 분야니 일단은 그런가보다 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참고로, 도시계획을 할 때 정말로 도로를 좁히고 주차공간을 줄인 도시가 있다. 내가 그 도시에 사는데, 거의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이 도시는 대중교통이 부족하고, 도시가 청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으며, 가족단위 구성원이 많아 쇼핑 물량이 많은 등이 원인이라고 보인다. "직관과 어긋난 혁신적 대안"이란 게 항상 옳은 건 아니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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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의 용광로는 두 달에 한번씩 정비를 위해 점검을 한다. 항시 용광로를 향해 불어넣어지는 고온, 초고압의 바람도 이때만은 멈춘다. 그렇지만 용광로 자체가 꺼지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불을 일부러 끄는 것은 아니며, 1500도에 달하는 쇳물 온도도 낮아지긴 할 지언정 어느 정도 유지된다. 용광로를 아예 끄면 어떻게 되는가? 제철업계 주장에 따르면, 용광로를 닫고 4~5일 경이 지나면 용광로가 사실상 정지된다고 한다. 이 경우, 용광로를 재가동하려면 5개월 여가 걸리며, 용광로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 안에서 녹아있던 쇳물이며 체계적으로 쌓아둔 코크스, 소결광 등이 용광로 벽에 눌러붙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철소는 수요 감소가 있다고 해도 용광로를 쉽게 끌 수 없다.

 

경기 침체라는 건 생각해보면 희한한 현상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건물이 있고, 기계장비가 있으며, 여전히 원재료가 있고, 숙련이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 있다. 모든 실물이 그대로인데, 주가는 폭락해 기업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경제가 돌아가지도 않는 것이 불황이다. 작금의 위기는 그래도 어제와 다른 상황 (전염병 위기)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더 이해가능성이 높은 위기이긴 하다. 대신, 생산능력 자체가 하락한 상황(노동공급이 단절)이기 때문에 해결도 더욱 어렵다는 것이 한계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도 계속 돌아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 이야기한 철강업이 대표적인데, 현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면 미래의 경기회복에 대비해 제철 능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당장의 손실에 불구하고 용광로를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끄면 다시 켜는데 너무 오래걸리니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곳곳을 뒤져보면 이런 산업이 더 있을 것이고 그런 걸 찾아내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에 덧붙여 업종 자체가 특별한 고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농업이다. 농업은 업종 전체가 사실상 "특정 시기"를 놓치면 짧게는 3~4개월에서 길게는 1년치 산출물이 급감하는 성질을 갖는다. 예컨대 벼농사에서 4월은 파종기인데, 만에 하나 이 시기에 농촌까지 코로나-19가 퍼져 농사에 지장이 있다면 금년 쌀 산출은 급감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농촌은 인구밀도가 낮고, 농가별 동선 등이 겹치는 일이 (기업 사무직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비교적 정상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수확기이다. 수확기에는 인근지역 거주 노인, 외국인 노동자(고용허가제), 계절근로(방문), 등이 투입되어 농사일이 진행되는데, 이런 인력의 유입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이 수확기인 양배추 등 야채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의외로 상당할 수 있다. 경기 침체 상황에 엉뚱하게 식자재 가격 상승이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총공급 충격 시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쳤을 때 나올 수 있는 부작용과 별개로) 1국에 닥친 위기라면 해외 농산물 수입으로 해결할 수도 있긴 할 것인데, 지금이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도 의문이고.

그런 걸 고려할 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농업에 인력을 투입할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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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 일본 경제를 총괄하는 대장성은 매년 10% 이상 오르던 일본 전역의 부동산 가격이 심지어 16.7% 더 올랐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전년 대비 주택가격 68.6% 상승이라는 기록을 보인 `88년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대장성이 `89년 한해 동안 여러차례 정책금리를 높이면서 세금도 높여왔음에도 여전히 잡히질 않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88년까지 1%대에 달하던 정책금리는 `90년 초에는 이미 5%에 다다르고 있었다.

 

부동산도 기본적으로 자산인만큼 수요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동하는 것이다. 다만 부동산은 수요(매년 새롭게 집을 장만하려는 사람만 실수요자로 치더라도)에 비해 '좋은 위치의 공급'은 적은 특성이 있다. 정책적으로 신규 물량을 아무리 공급하더라도(=신도시를 짓더라도) 기본적으로 '덜 좋은 위치의 공급'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때문에 경제성장기에는 대체로 가격도 함께 오르는 법이다.

 

그런데 일본의 당시 상황은 그렇게 설명할 것이 아니었다. 이 당시 일본은 미국과의 무역 분쟁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외교안보적으로 강하게 일본을 압박했고, 엔화가치를 올리라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85년 플라자 합의로 이어졌고, 인위적으로 엔화 가치가 높아졌다. `86년에는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강력한 금리 인하와 거대한 규모의 공공투자를 계획해야 하였다. `85년 플라자 합의 시점에서 GDP가 약 1,500조원 수준이던 일본은 `91년부터 공공개발사업에 10년간 3,50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고 이것이 경기 팽창에 대한 기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투기가 팽창되기 시작했고,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부호가 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고, 사람들은 높아진 부동산 가격을 배경으로 더 큰 액수의 담보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다시 구매하였다.

 

일본 엔화가치 상승은 무역감소로 연결될 것이고 그것이 경기침체로 다가올 것은 자명했지만, 눈 앞의 자산가격 상승이 사람들의 눈을 흐렸다. 이 시점에서 부동산 열풍은 광기로 변해서 일본 전역에 리조트며, 호화주택을 지어대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85년 전체 대출의 7.5%에 불과하던 부동산 대출은 `89년 시점에는 10.7%에 달하고 있었다. 총량 자체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다. `85년 금융기관의 부동산대출 총액은 200,917억엔이었는데 `89.12월에는 469,019억엔으로 4년만에 2배 이상 높아져 있었다. 금융기관 외의 대출(개인간 대출 등)을 고려하면 문제는 훨씬 심각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난 부동산 자산을 바탕으로, 기업과 개인들은 막대한 대출을 뽑아내어 미국의 부동산과 기업을 사고 있었다. 일본인이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록펠러센터를 비롯한 랜드마크들을 줄줄이 구매했고, 각종 영화사 등 주요 기업도 연이어 구매했다. 일본 각지의 미술관, 박물관에 깔려있는 피카소며 고흐의 미술품도 이때 대거 구매된 것이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농담이 횡행했다. 일왕이 사는 집 (일본 내부에서 이른바 '皇居'라고 하는 곳)의 추정 지가가 LA 전체 지가보다 높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건 국가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첫째로 일본의 경제적 역량이 너무 과도하게 부동산에 쏠리고 있었다. 금융자산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투자나 연구 등에 투입되어야 경제 생산성을 지속 개선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개인이나 기업 관점에서는 부(wealth)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지만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별다른 효율성 개선을 가져오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 시점 일본은 '미래를 차입해서 지금 부유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둘째로 일본 서민들의 불만이 위험수준까지 증가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부동산을 갖고 있던 자들과 아닌 자들 간의 자산 격차가 너무 커졌고,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해진 서민들은 강한 불신감을 국가와 사회에 보이기 시작했다.

 

셋째로, 일해서 저축하여 돈을 모으는 것에 대한 경시와 경멸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당시 물가상승율은 2~3% 수준이었고 엔고로 인해 임금의 구매력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론과 주변에서 온통 부동산으로 수천만엔, 수억엔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임금이나 저축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졌다고 인식되던 것이었다.

 

넷째로, 지방과 도시 간 격차가 너무 커지고 있었다. 이런 땅값 상승도 농촌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의 빌딩 한채가 시골의 한 현의 땅값에 맞먹는다는 농담마저 돌기도 했다. 자연히 지방에서는 도시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다섯째로, 정책에 대한 불신이 너무 심해지고 있었다. 대장성이며 국토청은 이미 `86년부터 부동산 가격 잡기에 나섰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여섯째로, 금융 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부동산가격은 오르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는 은행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대출은 은행의 전체 대출의 10% 수준이긴 했지만, 대출 건건을 보면 상황이 달랐다. `85년까지 은행은 부동산 가격이 1억엔이면 6천만엔 정도만 대출해줬었다. `90년에는 1억엔짜리 부동산에 1억2천만엔까지 대출하고 있었다. 부동산이 당연히 오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정부 내에도 이미 저금리와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이 문제라는 인식은 있었다. 허나 플라자합의로 인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더 컸고, 따라서 부동산 폭등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한동안 금리를 높이진 못했다. 오히려 국토청이 부동산 단기차익에 중과세를 부과하기로 한 직후에 대장성이 금리를 0.25%p 낮춘 사례도 있었다. 초기에만 해도 대장성은 부동산보다 경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라자 합의 등 연이은 미국의 통상압력의 결과가 오히려 미국의 기업과 부동산 구매로 이어진 상황이 주는 우월감도 일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여하튼 부동산은 `88년부터는 이미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부동산에 쏠리는 유동성만이라도 줄이자고 대장성은 실수요자 중심으로만 대출해주도록 은행에 협조를 요청하고, 조사, 지도도 실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은행의 이윤추구 성향을 막을 수 없었고, 막대한 물량(그것도 급격히 늘어나는)의 대출을 하나하나 심사할 방법도 없었다. 대장성과 국토청은 세금 인상으로 대응했다. 사실 세금 인상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버블 대책은 근본적으로 유동성 감소와 금리 인상이어야 하는데 이는 경기침체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택하기 힘들었다. 반면 세금 정책은 ① 문제가 된 자산 유형에만 원포인트로 적용될 수 있고, ② 전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며, ③ (재정관료들이 항상 걱정하는) 재정건전성 개선에도 유리했다. 이에 당시 일본은 보유세와 양도세를 모두 대폭 인상하였다. 덧붙여 공시지가도 크게 현실화하였는데, 사실상 세금 인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문제는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부동산은 몇천만엔, 몇억엔이 오르고 있었으며 가격의 120%가 대출되는 상황이었다. 세금을 아무리 높여도 번 돈의 100% 이상을 징세할 수 없는 이상 돈은 여전히 부동산으로 쏠렸다. 이 지경으로 가다보니 국토청 내부에서는 대장성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동성을 늘리고 금리를 낮춰 문제를 만든 건 대장성인데, 그런 원인 해소는 없이 사후적인 정책수단만 갖춘 국토청만 쪼고 있다는 식이다. 국토청은 공급 확대를 위해 대규모 택지개발 계획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었는데, 택지개발구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 택지개발에 따른 유동성 추가공급 등이 다시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기까지 해서, 그런 우려가 없는 도쿄만 매립계획 같은 대책마저 발표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지가상승감시구역' 제도도 도입해 관리하고 있었으나, `90년 초에 이르면 사실상 전국의 모든 도시지역이 이 '감시구역'에 해당하고 있어서 행정력의 한계마저 겪고 있었다. 국토청은 대장성을 더 강하게 압박하였다. 아마도 국회와 언론에서도 대장성을 압박했을 것이다.

 

결국 대장성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문제의 원인이 유동성이면 금리를 높이고 유동성을 제거해야 했다. 은행이 부동산에 덜 개입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89년부터 `90년까지 일본은행을 통해 총 5번 금리를 높여 2.5%이던 일본은행 정책금리를 6%까지 높였다. 덧붙여 시장의 금융기관들에게 대장성 은행국장의 명의로 서신을 보냈다. 부동산 대출증가율을 총대출증가율 범위 이하로 낮추고, 대출 실태를 모두 보고하라는 요구였다. 이것이 바로 '부동산 융자 총량 규제 不動産 關聯 融資總量 規制'였다. 이 통지에 따라 은행들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던 부동산 대출상황을 고려,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일시적으로 부동산 대출을 사실상 중단했다.

 

효과는 강력했다. 새로운 수요의 싹이 잘린 것이다. 엄청난 자산을 자랑하는 기업과 개인들조차도 그 재산의 대부분은 부동산과 주식의 형태였고, 새로운 부동산을 사려면 담보로 차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차입을 막았고, 돌아오는 어음 환수나 세금 납부를 위한 급매는 나오기 마련이며, '공급이 작아서 생기는 가격 급등'현상이 급속도로 실종되었다. 사실, 효과가 너무 강력했다. 가격 급등이 실종된 것에 멈추지 않고 가격 급락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부도 위기에 처한 자들이 급매물의 가격을 계속해서 낮춰서 팔려고 했지만 대출이 없어서 그런 가격에도 팔리지 않은 것이다.

 

대장성도 이럴 우려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던 것 같다. 주전住專이라고 불리는 주택금융전문회사(2금융권에 속한다)와 농협의 부동산담보대출은 애초에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락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둔 것이라고 할 것인데, 부동산 급락은 막지 못하면서 오히려 폭발은 키우는 장치가 되어버렸다. 대출총량 규제에서 제외된 탓에 대출 수요가 주전으로 몰려든 것이다. 주전의 대출총액은 `90년만 해도 3조엔 규모였는데, `95년이 되면 11조엔에 이르는 규모로 팽창했다. 그럼에도 부동산 급락은 막지 못했고 (당초 금융기관의 부동산 대출 '증가액'만 연간 수조엔 규모였던 걸 고려하자), 급락으로 금융기관의 담보들이 부실화되면서 대장성 권고를 철회(`91년 12월경)한 후에도 금융기관들이 대출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주전의 대출만으로는 충분한 대출물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버블은 호랑이를 탄 기세와 같아서, 일단 멈추면 그대로 위기로 전환되는 법이다. 주전의 대출 중 8조엔이 불량으로 판단되었고, 그 중 5조엔은 어떻게 해도 부실채권으로 남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일본 사회의 뇌관이 되어버렸다는 평가가 내려졌고, 대장성이 매 순간마다 판단을 그르쳤다는 일본 사회의 담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약 1천년간 유지된 '대장성'은 '재무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주요 관료들이 검찰에 입건되는 신세가 되었다. 예산권도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빼앗겼고, 금융감독권은 금융감독청을 신설해서 넘겼다. 재무성에는 재정정책기능만 남게 되었다.

 

책임있는 관료들은 문책했지만, 상황이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장기불황이 시작했다. 자산의 압도적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이 팔리지 않고, 팔려도 급락한 가격으로만 거래되기 때문에, 그리고 대출액은 여전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부실화되어 버렸다. '월급 모아서는 살 수 없는 부동산 가격'은 이제는 '월급 모아서는 갚을 수 없는 대출'로 변해버렸다.

 

`90년대 당시 국토청에 있던 관료들의 이야기를 보면 부동산 버블기 정책에서 결국 관건은 기존 물량이 적절히 시중에 흘러나올 수 있게(공급관리) 하면서, 투기성 수요를 저감하는(수요관리) 금리나 유동성 관리를 해주는 것이 관건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서 금융기관에 남는 유동성을 정부가 흡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거래를 제한하더라도 실수요자는 있기 마련이므로, 적은 공급량이 오히려 가격 급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이 '경제지리' 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신규 물량을 아무리 공급해도 그건 외곽지역의 이야기이기 쉽고, 외곽지역의 부동산이 흔해지니 반대로 코어지역에 더 수요가 쏠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한국으로 치면 강남 부동산가격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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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가 최소한 1회는 임대계약을 갱신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경우 임대비 상승폭도 5% 이내로 제한하는 법률이 재산권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법률에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침해에 해당하지 않으려면 본질적 부분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 부분에 대한 논의가 있는 모양인데, 본질적 부분에 대한 침해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번 법개정 특성상 조만간 누군가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할테니 헌재의 판단이 나올 것이고, 좀 다른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 제13조 ②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을 받거나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제37조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행위 중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있는 것이 토지조사사업이다. 당시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 위해 진행되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한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연계되어서 조선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땅을 주기 위한 정책들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다만 이는 초기의 연구 등에서 주로 주장되던 논의였고, 근자에는 말 그대로 소유권을 조작한 사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히려 근래의 연구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이 다른 맥락에서 수탈적이었다고 주장되고 있는데 바로 '소작권'의 부정이다.

 

조선시대까지는 토지에 대한 재산권은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먼저 산의 소유는 대체로 금지되어 있었다(「경국대전주해」 형전 추관사구 금제, 「추관지」 등). 논 밭의 경우에는 당연히 소유권이 있었는데, 여기에 관습적으로 도지권 賭地權이 인정되었다. 도지권이란 '그 땅을 사용할 권리'로 요약할 수 있는데, 작물을 무얼 심고, 토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을 정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였다. 도지권은 토지소유권자가 토지를 매매나 증여해도 소멸되지 않았으며, 도지권 자체도 상속하거나 거래하는 경우마저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은 소유권과 사용권의 병합이며, 부동산임대계약은 일정 기간 동안의 사용권의 제공이라고 본다면 조선시대에는 부동산 재산권 자체가 이분화되어 있던 셈이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으로 일제가 전국 토지를 조사하면서 이 구조를 바꿨다는 것이 문제였다. 첫번째로 임야의 소유권을 정해줬다. 무주공산은 국유지로 편입했고, 특정 가문이 선산으로 사실상 관리되던 산은 그 가문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두번째로 소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토지소유권을 일원화하여 이른바 일물일권 一物一權을 실현했는데, 이에 따라 일본인이 안정적으로 지주로부터 토지를 구입하여 임의로 소작인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 소작인들은 사실상 매년 소작계약을 갱신해야 했고, 경제적 상황이 보다 불안정하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서 일제에 의한 수탈이 용이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한반도의 토지가 자본화 capitalization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에르난도 데 소토 hernando de soto의 「자본의 미스터리 - 왜 자본주의는 서구에서만 성공했는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맹아기에 반드시 필요한 건 일종의 유동화한 자산 Asset Securitization, 즉 자본이다. 생산체계 확충 등에 투입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자본이 필요한데, 서구든 비서구든 전근대에 이미 방대한 양의 자산(특히 부동산)이 존재하고 있지만 법제도적으로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를 동원할 수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서구지역에는 자산의 소유권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으로서의 법제도가 아예 없거나, 혹은 하나의 자산에 다층적인 권리가 동시에 존재해서 거래 가치가 사실상 없어서 자본화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에는 어떤 의미로는 일물일권 一物一權적 방식의 재산권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가 있다, 라고는 할 수 있지 싶다.

 

그런데 현대 대한민국 수준의 경제상황을 갖춘 사회에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주택 시가총액은 약 5,056조원(`19년 기준)이고, 전체 국부 National Wealth는 1경 6,621억원 규모다. 주택 자산으로 대표되는 부동산의 다층적 재산권화로 인해 자본화가 설령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그 외의 자산 규모가 이미 적잖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미 2년 관행으로 이뤄지고 있던 부동산임대계약을 4년으로 하는 것이 본질적 부분을 훼손하는 것인지 의문이 있는 점, 부동산 거래를 제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경제성장에 따른 이익을 부동산 소유주가 대부분 가져가는 것이 위험감수자가 이익을 가져야 한다는 '자본주의 원칙'과는 상이한 점이 많다는 주장도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꼭 내가 세입자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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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97년말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를 `98년에 매우 크게 받았다. 한국도 피해가 컸다, 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좀 궤가 다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정권이 무너지고 학살극이 벌어졌다. 국가가 파산할 지경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끝모르고 추락하는 경제적 위기는 결국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시민들은 인도네시아 자산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중국계 시민들에게 울분을 풀었다. 중국계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98.5월 한달여간 1천여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건 이상의 강간 신고가 있었으며, 수천억원 규모의 재산 손실이 있었다. 수만명의 중국계가 외국으로 탈출했다고 알려져있다. 이 시기 자카르타 전역이 통제에서 벗어났으며, 1967년 취임하여 장기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던 수하르토가 그 여파로 결국 그 5월에 퇴임하게 되었다. 하반기에는 동티모르가 다시 독립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분쟁이 격화되어 이듬해에는 결국 동티모르 학살로 연결되었다.

 

이 인도네시아가 `98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13.1%이다.

 

소련은 세계의 양대 열강으로 약 40여년을 군림하다가 어느 순간 돌연 해체되었다. `91년 8월, 공산당 전통세력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연금되었고, 모스크바에 탱크가 진입한 뉴스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옐친과 시민들이 나섰으며,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 거리를 메우고 바리케이트를 쌓았으며, 쿠데타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각 지역도 속속들이 쿠데타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며, 전세계가 옐친을 지지했다. 쿠데타군은 실각하고 고르바초프는 풀려났으나 이미 주도권은 옐친에게 있었다. `91.12월 말, 결국 소련이 해체되었고 독립국가연방이 수립되었으며,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제도 변화는 너무 큰 비용을 가져왔다. 5백만명 수준에 이르던 소련군이 급격히 해체되어 민간으로 돌아와버렸고, 군에 남은 이들도 하루치 밥값에 겨우 닿는 급여만 받을 수 있었다. 평균수명이 10년이 낮아졌으며, 초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땅과 공장의 주인을 총으로 정하는' 경우마저 나타났다. 질병과 사고, 도피성 이민 등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가 감소했다.

 

이 러시아가 혼란의 중심이던 `92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14.5%이다.

 

중국은 냉전기 초반 빈곤 상태에 있던 국가를 빠르게 산업화하길 원했다. 청나라 시절의 강성함을 되찾고 싶었음이고, 실제로 지배이론이었던 맑스-레닌주의적 이념에서는 사회주의 체제국가에서 빠른 산업화가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냉전의 상대진영 중 2위의 경제대국이던 영국을 7년만에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했고, 당시 지도자였던 모택동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업 대증산 계획 정책을 마련해 추진했다. 훗날 대약진 운동이라 불리는 정책이었다. 참새를 모두 잡아댔고, 각지의 농촌 마을에 작은 용광로를 마련하게 했으며, 자영농과 부농의 토지를 취합해 농업을 집단화했다. 그 과정은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4천만명 이상이 굶고 병들어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실상 중국의 지방이 보유한 산업역량이 모두 비효율적인 용광로로 변모되었다.

 

이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1962년 당시 중국이 경험한 GDP 상승율이 -16.2%이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위에 떠 있는 나라"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산유량이 많았고, 그 원유 수출을 기반으로 정부재정을 편성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산유국이 마찬가지니 특이할 바가 없는데, 균형재정이 달성 가능한 기준유가를 121달러로 맞췄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2014년 국제유가는 연초 110달러 수준에서 50달러 수준으로 급락했고, 이후에도 계속 하락했다. 게다가 이 유가하락은 셰일가스 개발 성공에 따른 것으로, 항구적일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왔다.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이미 `14년부터 물가와 환율이 급격히 망가졌고, 마트와 백화점에 상품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한국인들의 뇌리에 남은 기억도 이때의 뉴스들일 것인데, 급기야는 물가상승율이 400~500% 수준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2019년에는 정치위기도 같이 번지게 되었다. 대립대통령이 취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세계가 두 대통령 중 하나를 지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무장병력이 상대 세력의 요인들을 테러하거나 암살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내전가능성마저 점쳐졌다.

 

이 `14년부터 `20년까지 베네수엘라가 경험한 최악의 GDP 상승율이 -24.4%이다.

 

시리아는 중동의 봄 끄트머리였던 `11년 3월 시작한 내전에 아직까지 시달리고 있다. `12년과 `13년 가장 격렬하게 내전이 있었으며, 수도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전 지역이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힘겨루기에 휘말렸다. 약 20~30만명이 내전에 병력으로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300만명 이상이 해외로 나가 난민이 되었으며, 국내 난민을 포함하면 약 1천만명의 시리아 국민이 난민으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내전 발생 전 2,200만명이 살고 있던 나라였다. 시리아 정부는 서구와 아랍에 의한 경제 제재로 인해 수출입이 막혀 군대에 월급조차 주지 못하고 있고, `13년부터는 '군대가 군 자금을 지역에서 징발'하는 것을 허용했었을 정도로 전근대적 모습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 시리아가 `12년과 `13년 경험한 GDP 상승율이 -26.3%이다.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9.11. 테러로 민감해져있었던 미국에 의해 공격받아 국가가 무너졌다. 2003년의 일이다. 30여만명의 다국적군이 투입되어 2주만에 수도가 함락되었고, 약 1만5천명의 이라크인이 사망했다. 이후 바트당 잔당을 직장과 사회에서 쫓아내는 조치 등이 이어졌고, 이라크는 혼란에 빠져들어 이후 내전으로 연결되었다. 기간시설은 모두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곳곳에서 종파분쟁과 테러와 분란이 일어나 수천 단위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어떤 추정에는 3년만에 20만명이 죽었다고도 했다.

 

이 이라크가 `03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33.1%이다.

 

금년 2분기 코로나19를 경험한 미국의 GDP 성장율은 -31.7%이다. 일본은 -27.8%이고, 영국은 -20.4%이며, 독일은 -9.7%이다. 아울러 이 수치는 이들 선진국이 2차대전 이후 경험한 최저치이며, 그 이전엔 비슷한 수치조차 경험한 바가 없었다. 추정에는 미국이 1929년 대공황기 경험한 GDP 성장율도 -12.9%라고도 한다.

 

위 내용은 엄밀한 비교는 아니다. 명목과 실질값을 엄밀히 나눠 본 것도 아니고, 연간과 분기의 차이도 있다. 수치를 보고한 것이 독재정부 당국인 경우가 많아, 조작된 수치일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GDP 성장율에 대해 한 추정을 할 수 있도록 정리해 올린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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