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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4.23 Roaring `20s에 관하여

After one year from the ratification of this article the manufacture, sale, or transportation of intoxicating liquors within, the importation thereof into, or the exportation thereof from the United States and all territory subject to the jurisdiction thereof for beverage purposes is hereby prohibited.        - The Constitution: Amendments XVIII, Section 1. (Passed by Congress December 18, 1917. Ratified January 16, 1919. Repealed by amendment 21.)



The eighteenth article of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is hereby repealed. - The Constitution: Amendments XXI, Section 1. (Passed by Congress February 20, 1933. Ratified December 5, 1933.)

 

-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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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는 그야말로 눈부신 시대였다. 한국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이던 이 시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별로 없다보니, 세계사적 사건인 1929년 대공황만 기억하기 마련인데, 이 대공황 자체가 바로 1920년대 장기호황의 끄트머리에 발생한 사건이다. 1921년부터 시작되었던 오랜 호황동안 주가는 4~5배 이상이 올랐고 임금도 적지 않은 근로자가 2~3배 이상 상승하여, 소비 확대를 향유할 수 있던 시기이다. GDP 자체가 42% 상승했고, 실업도 대체로 4% 수준에서 머물렀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미국에서 굳이 “Roaring `20s”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일만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1918년 1차 대전이 종료된 것이 사람들의 인식과 경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전쟁비용으로 지출되던 막대한 예산이 절감되었고, 사람들이 죽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전쟁사를 잘 모르는 현대인이 쉽게 짐작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당대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1차 대전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체제의 발달은 그때까진 상상도 못하던 대규모 병력을 모을 수 있게 해주었고, 철도기술의 발달은 병력을 놀라운 속도로 전장에 집결시키게 해주었으며, 기관총과 철조망, 콘크리트의 발달은 상상도 못하게 강력한 방어선을 선사했다. 수만명이 하루에 죽어나갔고 수십만명이 단 몇km의 구간에 집결하고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솜 Somme에서는 연합군이 단 9km를 진격하는데 양편에서 총 110만명 가량이 사망했다.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 하찮게 사라져 염세주의적 시각이 세계를 지배하던 이 시대가 1918년 돌연 종료된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가 개인 가구에 준 경제적 선물도 작지 않았다. 각국 정부가 발행한 전쟁채권이 일반 가계에 노동외 소득을 주었고, 전쟁기간 동안 동원된 남성들을 대신해 산업 현장에 뛰어든 여성들이 소득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스페인 독감이 이 새로운 경제적 선물의 향유 시점을 늦췄다. 전쟁과 함께 전세계로 퍼진 스페인독감은 1918년부터 2~3년간 2에서 5천만명의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아직 평균수명 향상의 효과가 미미하여 고령자가 적던 시기이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숫자의 위협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고, 자영업이 추락하였으며, 경제적 위기를 함께 겪었다. 다우존스지수도 1920년만 한정해서 본다면, 1919년보다 오히려 35%나 격감한 수치를 기록했다. 다만 스페인독감은 1919년말부터 돌연 사라졌고, 그 경제적 영향이 마무리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과 팬데믹 종료로 인한 낙관적 분위기와 경제적 부흥이 세계를 지배했다. 본격적인 경제적 ‘이륙’은 이 1920~1921년경에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이 만큼 전체 주가가 급격히 상승했다면 부자도 양산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랬다. 위대한 개츠비가 바로 1925년에 출판된 작품이고, 1922년을 배경으로 한다. 뉴욕 마천루 중에서도 눈에 띄는 디자인을 갖춘 크라이슬러 빌딩이 바로 20년대에 건축된 빌딩이다. (다만 완공은 대공황의 초입인 `30년이었다) 크라이슬러의 외관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 외장의 양식이 Art Deco, 알데코라고 흔히 일컫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를 상징하는 이 양식은 그야말로 20년대를 석권해서, 디젤펑크와 같은 ‘미국의 잘 나가던 시대’를 그리는 작품들에 반드시 등장하는 양식이 되었다. 밝고 폭발적인 색채의 대립과 함께 기하학적 형상들이 아로새겨진 건물과 내장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보통은 건축사적 유행의 변화는 매우 천천히 퍼지기 마련인데, 알데코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럴 돈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 빌딩 뿐 아니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도 이 시기에 지어졌고, 그 외에도 숱한 뉴욕의 빌딩들이 이 시기에 착공되었다. 

 

 미국인들의 눈을 장악하던 것이 알데코라고 한다면 음악은 재즈였다. 재즈의 전성기라고 할만한 시기였고,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전설적인 가수들이 이 시기에 크게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세대의 음악가들과 차원이 다른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무대의 질과 양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라디오였다. 1906년 최초의 방송에 성공했던 라디오는 1920년 최초의 상업방송국으로 발전했고, 1922년 최초의 정기적인 매스미디어 예능이 라디오에서 송출되었다. `20년대는 라디오의 시대가 되었고, 라디오의 제조업, 방송업, 예능 등이 급격히 세를 불렸다. 정부의 규제당국이 처음 구성된 1927년 전까지 라디오 산업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 무렵에는 약 40%에 가까운 미국인이 이미 집에 라디오를 갖고 정기적으로 청취하게 되었다. 최초의 방송이 시행된지 고작 20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디오는 자동차와 함께,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류문명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강고하게 형성하기 충분했다. 1913년 미국 전체에서 단 48만대 생산가능하던 자동차는 1924년에는 연간 350만대 생산 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이 시기 전국적으로 약 1500만대의 자동차가 판매되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가계들은 실질임금 상승과 함께 자동차 덕분에 생활 수준의 급상승을 경험했고, 모텔이나 드라이브인이 형성되었다. 당시에도 이미 고가품이었던 자동차와 라디오를 구매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할부거래’가 활성화되었고, 주가 상승과 맞물려 금융산업 발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신용거래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가 만들어준 광역권 유행과 함께, 미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가 바뀌었다. 

 

 자동차의 확산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시기는 정유산업의 폭발적 발전이 배경에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Standard Oil이 1911년 해체되고 만들어진 ExxonMobil , Marathon Petroleum , Amoco , Chevron 등의 회사들이 해체에 불구하고 급격히 성장했으며, 해체되었음에도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해외 유전회사들을 병합해나가던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어떤 의미로는 자원투자라는 식민경제를 대체할 새로운 모델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기실, `20년대의 폭발적 호황의 배경으로 흔히 지목되는 것이 바로 이 제2차 산업혁명이기도 하다. 19세기 말부터 천천히 발달하던 통신, 정유, 철강 및 내연기관의 발달이 꽃을 피운 것이 우연히 이 `20년대이고, 그것이 대호황으로 연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기 사람들이 기술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배경일 것이다. 

 

 기술의 혁신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 잡은 것은 바로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이었다. 1927년 “세인트루이스의 혼”을 타고 기착 없이 한번에 뉴욕에서 파리로 넘어간 찰스 린드버그는 새 시대의 기술적 혁신을 상징하게 되었고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항공산업의 희망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20년대 말에는 곳곳에서 예측되고 있던 미디어나 정유산업의 성장 둔화를 메꾸고 그 이상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들이 퍼져나갔다. 

 

 이 시기의 호황은 단순히 미국만의 것이 아니고 세계사적인 것이기도 했다.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는 이 시기를 Belle Epoch의 마지막 시기로 부르는데,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찬가가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Annees Folles라고 하는 시기인데, 마찬가지로 문화가 폭발하고 주가는 4.4배 증가했다. 넘쳐나는 돈은 유럽에서도 투르 드 프랑스를 활성화시켜 오늘날과 유사한 스테이지 구조로 안착시켰고, 다른 리그들도 부흥시켰다. 기득권이라 할만한 서구 남성들만 이 시기를 향유한 것이 아니었다.  호황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했고 억압을 약하게 만드는 법이다. 이 시기 여성 참정권이 급격히 확대되고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성화된 것은 억압의 약화 탓만이라 보긴 어렵고, 1차 대전 기간의 여성의 산업활동 등 복합적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식민지 지역에서 탄압이 약해진 경향이 있던 건 시대적 사조라고 보는 게 맞지 싶다. 한반도에서도 바로 이 시기가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기간이었다. 1919년 취임해 1927년까지 총독직을 맡았던 사이토 마코토는 재임기간 동안 일반경찰에 의한 식민지배를 시행했다. 통상 교과서에서는 이 시기 문화통치가 1919.3월 3.1운동의 여파로 인한 것이라 저술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세계사적으로도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완화된 식민지배를 경험했다. 식민제국들 자신이 새롭게 번지는 자유주의적 사조를 경험했고, 그 사람들이 식민기구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의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다. 패전국이 보유하던 식민지를 승전국이 재분배하면서, 위임/자치통치를 골간으로 하기로 논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최소한 외양에 있어서는 유화적 식민통치로 전환된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 다만, 1922년 남아공 반란 등에서도 알 수 있지만 현지 주민은 여전히 폭압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승전국 식민지에는 당초부터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흔히 퍼져있는 오해*와 달리 독일에게조차도 이 시기는 대체로 행복한 시기였다. 1차대전 패배와 그에 이은 베르사유 조약이 야기한 독일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오판이 겹쳐서, 20년대 초기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것이 사실이다. “식당을 들어설 때와 밥먹고 나올 때 가격이 달라서 메뉴판에 가격이 기재되지 않던”, 그리고 “아이들이 블록장난감보다는 저렴한 현찰뭉치를 쌓고 놀던” 초인플레이션은, 그러나 1924년경 종료되었다. 독일 뿐 아니라 초인플레이션을 함께 경험하던 4개국(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독일)은 1924년 일제히 초인플레이션의 종료를 경험하였고, 1924년부터는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독일어로는 이 시기를 Goldene Zwanziger라고 하는데 같은 의미이다. 1924년 미국에 의해 제안된 Dawes Plan에 의해 상당한 차관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연간 배상금 부담도 감소(총액은 유지)한 독일은 경제적 부흥을 경험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이 문화적 폭발을 함께 향유했다. 

 

 * 일부에서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득세하게 된 것이 이 시기 세계적 호황에 불구하고 독일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어서 그 반동으로 극단주의가 세를 얻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 독일이 침체를 겪은 것은 20년대 초반, 그리고 1929년 대공황 이후의 일이다. 나치당은 이 초인플레이션 기간(1919~1925)에 창당해 득세했고, 1923년 맥주홀 폭동까지 세를 얻었다. 그러나 맥주홀 폭동 실패로 히틀러는 투옥되었고(6개월간 복역하며 Mein Kampf를 저술했다) 나치당이 다시 확연히 세를 얻은 것은 세계대공황 이후인 1930년 9월 독일 총선에서 18%를 득표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런 호황은 다른 분야에서의 자유주의적 사조와 달리, 희한하게도 경건한 어떤 금제, 문화적 금기로 연결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가 금주법의 시기라는 점이 그러하다. 사실 금주법이라는 용어는 그 시절의 뉘앙스를 정확히 살리지 못한다. “금주헌법”의 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20부터 1933년의 기간은 Prohibition Era라고도 하는데, 종교적 경건성이 한 극단에 다달아 술 그 자체를 금지하는 규정을 “헌법”에 직접 규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글 최상단에 인용한 규정이 바로 그것인데, 미 수정헌법 제18조가 알콜의 금지를 규정한 내용이다. 이 규정은 1932년 대선에서 F.D.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개헌을 공약하고 나서 당선된 뒤에 비로소 없어질 수 있었는데 이것이 미 수정헌법 제21조의 내용이다. 1932년의 대선의 핵심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금주법이었다고 한다. 기독교 단체 등에서는 자경단을 구성하여 술을 마시거나 기타 불경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이들을 신고하고, 규제했다는 이야기마저 있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축적되었고 막대한 손해를 본 양조업자와, 무엇보다 농부들이 반발했다. 술을 허용하라는 입장을 갖는 반대단체가 급속도로 형성되었다. 게다가 밀주가 횡행했고, 오래된 창고 등에 있는 술들이 발굴되었다. 합법적으로 알코올을 판매할 수 있는 의사와 약사가 엄청난 부를 모을 수 있었는데, 그보다 더 큰 부를 모은 것이 마피아였다. 이 시기는 달리보면 마피아의 시기였는데, 이들은 경제호황보다는 이 금주헌법 덕분에 밀주를 만들며 부를 모을 수 있었다. 알카포네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1910년대 초반까지는 ‘모두가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술에 대한 규범적 금지를 이끌어낸 이 금주헌법은 자그마치 13년간이나 이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승리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이는 놀라운 이야기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술도 없이 이 광란의 20년대 문화적 폭발을 일궈냈다는 것이니까. 

 

 최근 일부에서는 2020년대가 1920년대 장기대호황이 반복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듯하다. 1920년대가 1차대전의 종료, 스페인독감의 종식, 그리고 2, 30년 전부터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의 고도화로 인해 장기적 호황을 누렸다는 분석을 토대로, 2020년대는 코로나19의 종식, IT 버블 이후 20여년간 다져온 제4차 산업혁명의 고도화가 새로운 장기호황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선 1920년대 호황이 낯선 주제인 만큼 관련하여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도록 작성해보았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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