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이 임박했다고 언급되는 것치고는 분석이나 탐구가 적은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신경써서 찾아보아도 의사들이 왜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것인지 그 논리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 일부 언론이나 인터넷 여론 등은 의사들이 힘이 있기 때문에 이기적인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논리를 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은데 이는 매우 강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의사들이 우려하는 지점들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따라서 일단 의사들이 합리적 이유가 있어서 반대한다고 가정을 해보고, 관련 논의들을 관련 연구자료(`11. 연세대, `21. 보사연, `23. KDI), 의사협회 임원 등의 발언, 관련 분야 연구 등 바탕으로 추정해보았는데, 다음 취지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지만 아래 이야기는 내 생각과 무관하며, 의사들이 반대하는 대외 논리라고 추정한 것에 불과하다. 모두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 



󰋼 목적 관련 : 의사 증원이 필요한지

  의사 증원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고, 의료서비스에 대한 접근성, 의료서비스의 질적 향상, 국민 수명이나 건강의 증진, 국가적인 의료비부담 경감 같은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의 의료서비스 수준이 이미 세계적이라는 점이다. 종합지표를 보자. 단적으로, ‘제대로된 의료 서비스가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사람’은 10만명당 142명으로 OECD 평균인 239.1명보다 한참 적다(OECD 5위). 기대수명도 매우 높다. OECD 평균인 80.6세보다 상당히 높은 83.6년이다. 반면 외래 진료수는 국민 평균 연 15.7회로 OECD 최고이고, 그러면서 경상의료비는 GDP의 9.3%로 OECD 평균에 하회한다. (OECD Health Statics 2023, `23.7.26 보건복지부) 개별 지표별로도 한국의 의료서비스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예컨대 수술대기의 경우 한국은 백내장 수술은 당일 즉시 수술이 가능한데, 한국 외에는 이런 사례가 없다. 북유럽 국가조차도 44일(스웨덴)~108일(노르웨이)이 소요되고 있다. 영유아사망률, 심근경색 시술, 그 외의 수술, 투석 등등을 보더라도 그렇다. 세계 최고 수준을 이미 달성하고 있다면, 급격한 제도 변화가 정말 개선을 야기할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서 믿을만한 레퍼런스가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이미 인구 1천명당 의사수가 훨씬 더 많은 국가들에서도 의료서비스 수준이 한국보다 낮기 때문이다. OECD는(OECD Health at a Glance, `23) 건강상태, 건강위험요인, 의료접근성, 의료의 질, 의료자원 등 5개 지표별로 각각 4개의 하위지표를 설정(총 20개 하위지표)해 선진국 의료 상황을 진단했는데, 한국은 이 20개 하위 지표 중 4개는 우수한 수준(기대수명, 회피가능했던 사망, 비만율, 천인당 병상수), 1개는 개선 필요(의료비 개인부담율)을 달성하고 다른 지표는 모두 평균 정도를 기록했다. 국내 전체 노동시장 중 보건분야 인력의 비중도 한국(9.3%)은 OECD 평균 수준(10.5%)이었다. 의사 수의 증가도 매우 빠른 편이었는데, `11년을 기준으로 `21년을 비교하면 약 31%가 증가하여, 프랑스(+8%), 일본(+14%), 영국(+23%), 그리스(4%)보다 빠르게 증가하였다. 한국보다 증가 속도가 빠른 국가는 호주(+39%), 노르웨이(+35%)에 불과하였다. 이를 고려하면 의사 수 증원의 효과도 신중하게 봐야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애초에 문제의 초점이 다른데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은 환자를 병원에서 보도록 하는 것이 문제라는 가설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진료 거부를 금지하고 있는데다가(의료법 제15조) 사실상 모든 질환을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고 있어서(`23.4.4 의료보장혁신포럼, 보건복지부 주관) 의료체계의 양적 부담이 큰 편인데, 그로 인해 의사인력 부족 체감이나, 짧은 진료시간 불만 등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모든 나라가 이런 제도를 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유럽국가들 중 상당수는 주치의제도를 두고 있는데, 이 주치의 승인이 있는 경우에만 별도의 전문의나 상급의료기관에 찾아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결과 의료체계에서 중증 환자 위주로 운영되어야 맞을 종합병원조차 외래 환자의 18.9%를 경증 환자로 맞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21년 기준, 국회 최혜영 의원실) 보건복지부는 105개 경증질환을 지정하여 별도로 관리하고 있는데, 상급종합병원에서 105개 경증질환으로 진료받은 진료비 지출은 총 4.79조원(`18년 기준, 보건복지부)에 달하며, 전체 건강보험예산(63.0조원)의 7.6%이다. 의원과 같은 기초의료기관, 2차 의료기관인 일반종합병원을 제외한 수치임에도 그렇다. 같은 해 건강보험 재정의 적자 규모는 3.89조원(`18년 건보공단 재무결산 공시)인데, 그보다 큰 수준인 것이다.


  이와 관련된 사례로 제시되는 것은 예를 들어 주취자 문제가 있다. 주취자가 길에서 자고 있는 것을 누군가 발견해 신고하면, 경찰 또는 119는 이 사람을 응급실로 데리고 가고, 응급실에서는 이 사람이 술에 취한 것인지, 다른 질환이나 상해가 있는지를 검사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22.10.17 의학신문, “의료접근성에 관하여) 경찰은 21개 주취자응급의료센터를 지정하고 있으나, 이 곳의 이용 건수는 연간 6,332명으로 전체 주취자 97.6만건의 0.6%에 불과한데(`22년 기준), 그 외의 의료기관에 이송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취자 문제를 오히려 병원에 더 많이 부담을 주도록 하는 대안도 상당히 제기되는 모양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주취자가 발생한 경우 초동부터 의사의 검진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권고(`23.2.27, 입법조사처 이슈와 논점 2064호)하기도 했는데, 같은 보고서에서 검토한 4건의 해외 사례(영국, 호주, 일본, 프랑스) 중 오직 프랑스에만 의사의 검진 의무 제도가 존재함에도 그렇게 제안했다는 점이 이상해 보인다.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지표가 있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은 신기할 정도로 국민 개개인이 본인 건강에 대한 자신감이 낮은 국가이다. 본인이 인식하는 건강상태(Perceived health status, OECD STATS에서 `24.3.2 19:52에 확인)에 대해 `22년 한국인들은 단 49.2%만 건강하다고 응답하여 37개국 중 최하위 수준(34위)였고, 건강상태가 안좋다고 응답한 사람도 14.3%에 달해 37개국 중 5위로 높았다. 이보다 열악한 나라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크로아티아와 같은 의료접근성이 현저히 좋지 않은 국가나 포르투갈 뿐이었다. OECD 회원국 중 6위의 기대수명, OECD 평균에 하회하는 전염병, 순환계질환이나 암으로 인한 사망률 등을 고려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수치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평시 건강수준이 실제로 낮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으나(장시간 근로 관행이 OECD Review of public health : Korea(`20.3월) 보고서 내에 언급되고 있다), 반대로 건강에 과민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선 의료시스템에 경증환자 부담이 매우 극심하게 체감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고,


  어떤 시각에서는, 한국이 선진국에 비해 진료 대상을 과도하게 넓히고, 의사의 의무를 과도하게 넓혔기 때문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볼 여지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의사들이 지적하는 ”우선 해결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24.2.25. 의협 범의료계대책특별위원회, 집회 중 이필수 회장 발언) 중에는 이런 부분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목적 관련 : 의사 증원으로 기대한 효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인지

  기실 지금 의료분야의 쟁점은 단순히 의료서비스 개선이 아니고, 격차의 해소일 것이다. ①흉부외과와 같은 일부 과와 그 외의 과 간 소득격차가 너무 커서, 저소득 전공에 인력유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②의사들의 서울 쏠림이 커서 지방에서는 매우 높은 보수를 지급한다고 해도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무의촌(無醫村)이 발생하고 있다. ③의사와 그 외의 분야간에 소득격차가 너무 커서 입시단계부터 거의 모든 학생들이 의대진학준비에만 몰입하고 있다.

  의사증원론은 이 격차 해소를 위해 의사를 늘리자는 것이다. 공급이 증가하면 더 많은 수요가 충당되는 것은 기초적인 수요공급이론이기 때문에, 일단 일리는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인력 수급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공급 확대가 실제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의사의 수가 경제적 유인을 악화시킬만큼 증가하게 된다면 그것도 문제일 수 있다. 의사의 수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고, “활동의사”의 수가 중요한데, 현재는 의사의 92.5%가 활동의사이므로 의사 면허의 수 증가가 관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적 유인이 크게 악화된다면, 면허수와 활동의사간 괴리가 커질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면허직종이 존재하는데, 다름 아닌 간호사다. 간호사는 자그마치 27.2%가 비활동 인력이며, 아예 타 직업으로 전환한 경우도 10.2%에 달한다.(`22년 복지부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 기실 이 수치조차도 과대평가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간호사의 비율로 따지면 52.8%에 불과하기 때문이다.(`23. 대한간호협회, 활동간호사 중 양호교사 등 다른 기관에 종사하는 경우 제외시) 의사도 충분히 이렇게 될 수 있으며, 정원 확대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 유인과의 관련성은 낮으나(일 가정 양립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01년에 비해 `21년 의사 수는 32.9% 확대되었는데, 활동 의사는 오히려 6.7% 감소하여 의료 공급 악화가 있었다는 연구도 있다. (`22.9.19, E.Rhodes, JAMA)

  한편 공급 확대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격차 개선까진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격차가 실제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서울-지방간 의료인력 격차로 보면, 한국은 대도시와 시골간 의사 분포가 인구 1천명당 2.5명 vs. 1.9명인데, 이 0.6명p의 차이는 OECD 평균(1.5명p)보다 훨씬 적은 것이며, 이보다 격차가 적은 나라는 에스토니아, 스웨덴, 일본 등 소수에 불과하다.(OECD Health Statics 2019, 의협 의료정책연구원)

  격차가 실제로 큰 문제라고 해도 다른 구조적인 문제로 공급 확대가 해결방안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선 해결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24.2.25. 의협 범의료계대책특별위원회, 집회 중 이필수 회장 발언)로서 같은 날 집회에 참석한 전남의사회 선재명 의장, 한국여자의사회 홍순원 회장은 그 구조적인 문제가 바로 저수가와 사법리스크라고 짚어 언급했는데, 특정 전공에 치우친 사법리스크는 의사 공급이 확대되더라도 해소되지 않을 문제일 수 있다. `18~`22년간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된 의사는 하루 3명, 연평균 754.8명에 달하는데(`23.10.24. 의협신문, ”'하루 3명 꼴 형사기소' 의사 사법 리스크 '상상초월'“), 의료분쟁조정법 제46조 1항에서는 보건의료인이 충분한 주의의무를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의료사고의 경우를 분만으로만 한정하고 있고, 책임 범위를 넓게 인정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지적이 있다. 외국은 이와는 다르다. 일본은 `11~`15년 동안 연 평균 4.2명의 의사만 기소되었다. 영국은 `07~`18년의 12년간 단 37명의 의사만 경찰에 입건되었고(기소와 다르다) 미국은 의사의 업무상 과실치사상이 인정될 수 있는 행위를 약물과다처방과 같은 사항으로 나열하여 규정하고 있다. (`23.3.3, 의협 의료정책연구원, ”필수의료 활성화를 위한 정책방안 연구“). 의료 분쟁으로 넓혀서 보면 더욱 사례가 많다.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인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20년 한 해에 접수된 의료분쟁은 1,905건인데,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된 의사 평균의 2.5배가 넘는다. 매년 의사 100명당 1.84건이 접수되는 셈인데, 이 수치는 신경외과(의사 100명당 7.55건), 정형외과(5.79건), 흉부외과(3.22건), 응급의학과(3.02건) 등에서 더욱 높다. 평균 이상인 과 중 이른바 인기과는 성형외과(4.78건) 한 곳에 불과한 실정이다. 평균적으로 건당 1100만원의 중재금으로 합의되고 있는데 위 과들은 대체로 합의금 수준도 높은 편이다. 이같은 구조가 유지된다면, 의사 수를 증원하여 인기과의 수익성이 악화된다고 하더라도 인력수급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가능할 것이다.



󰋼 산출규모 관련 : 증원 규모가 적정하게 산출된 것인지

  연 2천명의 증원 규모의 근거에 대해 보건복지부(`24.2.1.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24.2.6. 의사인력 확대방안 긴급브리핑)는 KDI, 서울대, 보사연 연구를 제안했는데, 정확히 해당 자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엄밀하진 않으나 다음 내용일 것으로 보인다. KDI(`23.6.27. 의사인력 수급추계 전문가 포럼에서 권정현 박사가 발제한 자료), 서울대(`20년 간호대 김진현 교수, ”의사인력의 중장기 수급추계와 정책 대안“, 의대 김윤 교수, `23.10.17.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 각종 포럼 참석 등), 보건사회연구원(`21.12월, ”전문과목별 의사 인력 수급 추계 연구“). 이들 자료는 대체로 `30년 기준으로 의사가 1.4~2.6만명 부족할 것이며, 그 해소를 위해서는 의사 정원을 2~4천명 증원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중 일부에 대해서는 의사 측에서 이견이 있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보사연의 자료에서는 의료서비스 공급을 주 40시간 근무, 연 19일 연차 등 휴가 사용 등을 토대로 226일간 근무한다는 전제로 계산했다. (`23.12월 보건사회연구원, 국민신문고 답변). 의사들의 실제 근로시간을 반영한다면(`16 전국의사조사, 연 300일, 주 50시간 근로) `35년 기준으로 오히려 3.5만명의 감원이 필요하다고 계산된다는 문제가 있다.(`23.4.8., ‘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의사들의 모임’ 블로그 게시물, `23.4.25 보사연 해명자료)

아울러 `23년 정부 요청에 따라 전국의 각 의대가 있는 대학교에서 제출한 내년 즉시 증원가능한 최소 2,151명에서 최대 2,847명의 의대 정원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어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공정한 사회를 바라는 의사들의 모임’은 동 수치가 실제 증원이 필요한 의대생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의대생 양성의 손익분기점 달성에 필요한 의대생 수라는 의견이다. (진위 여부는 확인 곤란) 따라서 이걸 근거로 필요 인력을 산출하는 것은 모순적이라는 지적도 있는 상태이다.

  외국 사례를 단순하게 가져와서 비교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의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현재 한국의 의사 증원 논리 중 중요한 부분은 OECD 평균 의사수준(1천명당 3.7명)에 한국의 의사(2.6명)가 크게 부족하다는 점인데, 국가별 의료시스템의 차이, 인종 및 민족별 유병률의 차이 등이 고려되지 않은 단순 비교라는 한계가 있다. 기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세계적으로 4400만명이 걸려있고, 매년 11만명이 사망하는 SCD의 유병률이나 사망률이 현저히 낮아서 의료통계에도 드러나지 않는 수준이다. (NIH `21년 통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22년 건강보험통계연보 등) 이것은 한국의 높은 의료수준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SCD(Sickle Cell Disease)는 아프리칸계 인종에게서만 발병하는 유전병인 것 뿐이다. 한국의 성인병(고혈압, 당뇨병 등) 유병률은 OECD 평균과 유사한 수준인데, 이는 한국 의료 수준이 평균수준이라는 의미일까? 그것도 아닐 수 있다. 성인병 유병률이 비만율, 기대수명 등에 복합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비만율은 매우 낮고 기대수명은 매우 길다. OECD Health at a Glance, `23) 이같은 차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적정 수준을 따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을 법하다.

 

 

 

󰋼 이행가능성 관련 : 인력 양성 및 배치가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레지던트(Resident)는 현대에는 의사 면허를 취득한 자가 구체적 전공과정에 들어가서 수련을 받는 과정에 있는 자로서 대체로 2~5년차인 자를 의미한다. 이 말은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거주하며 의료행위를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에서 시작한 표현이다. 대체로는 Osler, Halsted 등에 의해 1889년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보나, 일부(미시간주립대)에서는 1874년경 미시간주립대병원이 더 선도적으로 도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레지던트 과정의 필수성은 다음의 두 가지로 설명되는 것 같다. ①의사 면허를 취득한 자만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데, 의료행위는 특성상 해봐야 습득할 수 있다는 점이다. ②응급환자의 존재 탓에 병원은 24시간 언제나 열려있어야 하고, 초도 대응단계에서는 중증 환자 외엔 검사행위가 주로 필요한데, 이를 위해 대규모 전문의 인력을 상시 대기시키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같은 특성에 따라 19세기 말 존스홉킨스대학병원(혹은 미시간병원)에는 상주하는 의사제도를 도입하였고, 신규의사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응급환자의 계속성있는 진료를 위해 초기에는 레지던트가 연속 30시간 이상을 근무할 것을 요구했으나, 현대에는 20시간 정도로 조정되었다는 지적들이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연차가 낮은 레지던트들은 주요한 의료행위에 있어서 모두 높은 연차, 혹은 상급자의 지도와 편달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수련의 의미인 동시에 잘못된 의료 행위는 환자를 순식간에 장애나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레지던트 양성을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상급자가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단번에 교육 역량을 넘는 수준의 증원을 할 경우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의사를 양성하게 되거나, 혹은 의료사고가 유발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사회적 부담 관련 : 증원이 야기할 부차적인 문제는 없는지
  교육체계 부담 외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재정지출 확대, 그리고 유인수요의 문제로 보인다.

 

  유인수요는 ”전문가는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의사 수 확대가 과잉진료와 과잉치료 유발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가 그것이다. 기실 이 문제는 실존여부, 그 규모 등에 대한 증명이 매우 어려운데, ‘유인수요라고 증명할 수 있었다면 이미 그 나라 건강보험체계가 거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인수요가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보험심사체계에 대한 의사들의 적응과 함께 발달하기 때문에 그 규모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경험적 연구가 다수 있는데 이 유인수요의 실존 여부에 대한 판단이 엇갈리는 편이다. 다만 의사의 보수체계를 함께 고려하면 유인수요가 있다는 의견이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 의사가 제공된 서비스의 양에 따라 보수를 받는 ”행위별 수가제“의 경우 유인수요가 확실히 나타날 수 있다는 견해들이 있다.(`00. Handbook of health economics, McGuire) 이를 함께 고려한 최근 연구에서는 의사수가 1% 증가할 때 사람들의 병원 방문횟수가 0.75% 증가하였고, 처방비용도 0.4% 증가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22 A.Dzampe, ”Competition and physician-induced demand in a healthcare market with regulated price: evidence from Ghana“, NIH) 과거의 유인수요에 대한 연구들(Fuchs(`78), 의사 비율 10% 증가시 수술이용률 3% 증가, Cromwell(`86), 의사증원시 선택수술 선택 비율이 통계적 유의미한 수준으로 증가 등)과 유사한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재정지출과 관련해서는 영국의 사례를 참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지금 논란이 되는 한국 수준 이상으로 의대생 정원을 크게 늘린 경험이 있다. 그 이전까지 영국 의대 입학자는 `90년대말 연 5,062명에서 `00년대 초 7,932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당시 영국은 `60년대 이후로 의대정원 증가없이도 꾸준히 의사수가 증가하고 있었으나, OECD 당시 평균인 1천명당 2.9에 크게 하회하는 2.3명 수준을 기록하였고, 일과 가정의 양립을 바라는 의사가 늘고 있어 투입근로시간이 줄어드는 추세였던 문제가 있다.(당시 논문에는 ”여의사의 증가“를 지적하고 있기 까지 하다) 이같은 문제의식이 대폭적인 증원으로 연결되었다. 당시 대폭적인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해 일부 논문은 연수에 필요한 병원(아래 수련병원) 신설, 증축 등 사회적 비용은 상당히 늘어난 반면, 수련병원 특성상 효율성은 낮았고, 생산성도 악화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06.6, K.Bloor. ”Do we need more doctors?“, JRSM) 반면 현장의 분위기는 상반된 것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영국의 의과대학협의회(MSC)는 `21.10월 영국의 의대 정원을 당시 9,500명에서 14,500명으로 증원할 것을 요청하였는데(The expansion of medical student numbers in the united kingdom MSC position paper), 그러면서 동시에 이 보고서에서는 의사들을 숙련시킬 교육 및 임상체계가 부족하다는 것을 함께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5천명의 의대 정원을 늘리기 위해서는 매년 약 10억파운드의 재정지원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있는데, 이는 16.8조원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 단기적 인력 부담 관련

   사실 의사들이 가장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논리가 가장 설명되지 않는 지점은 이 부분 같아 보인다. 정부의 정책대로 연간 2천명의 증원이 있을 경우 흉부외과 등 비인기과의 의사들이 오히려 유출될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일견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주장이 아니다보니 논리가 필요한데, 설명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어디에도 관련 문헌이나 논리를 찾기 어려워서 글자 그대로 추정에 불과한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닐까 싶다.

- 금번과 같은 고강도의 개편에도 여전히 비인기과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점
- 정원 확대시 7~10년 후에는 의사 수익성 악화가 우려되므로, 비인기과 의사로서는 지금 바로 이탈할 유인이 강해지는 점
- 이번 의료대란으로 전공의 대부분이 이탈해서 재직 중인 전문의의 업무부담이 심각한 수준까지 가중되고 있는데, 과거 경험으로 볼 때 이 조치가 장기화될 것이고, 이를 견디지 못할 것이 예상되는 점.(`00년 의약분업 사태 때는 2~10월간 진행되었고 의료기관별로 기간 중 4~8개월간 전공의없이 업무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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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우크라이나 행정부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한국 국민을 향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요지는 '한국도 6.25 때 지원을 받아봤으니, 지원의 필요성을 알 것이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위기를 겪는 나라라면 국제적 지원을 얼마나 간절히 원할지 알지 않냐는 취지로 보이긴 했는데, 이게 인터넷 일부에서는 꽤 반감을 사고 있는 모양이다. 

 

 관련 기사(요지가 잘 드러나진 않았다)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30530500133&wlog_tag3=naver 

 관련 인터넷 게시글(제목부터 반감이 드러난다) : http://m.slrclub.com/v/free/40124865

 

 아래 글을 쓴 사람들의 반감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긴 하다. 저 지원을 받은 바로 그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은 분명히 북한을 지원했으니까.

 

 문제는 그 반감이 선진국 관점에서 그렇게 이해가능한 것이 아닐 거 같다는 점이다. 우선 젤렌스키 대통령이 호소한 건 그냥 국가적 경험의 유사성인데, 인터넷 도처의 반발은 굳이 그 경험의 진영을 가르는 것을 근거로 삼는 점이다. 이게 합리적 반론으로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둘째, 6.25 시점에서 우크라이나에 주권이 없었다는 문제가 있다. 따지고 들자면 6.25 당시 진영에 따른 반론은 오히려 "그럼 2차대전에 일본 식민지로서 참전한 한국은 패전국인가"는 반론에 취약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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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시적에 핵전쟁에 관한 자료를 보다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전술핵무기 1발을 투발해서 기갑중대 1개를 타격할 수 있다는 부분 때문에 그랬다. 기갑중대면 고작 전차 10대 남짓이고, 국군의 전차는 2천대가 넘는데? 산술적으로 핵무기 200발을 투발해야 한국군의 야전 기갑역량을 뭉갤 수 있다는 건가? 이어지는 내용은 더 놀라웠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날려버린 핵무기(15kt)보다 훨씬 강한 핵무기로도 적국의 핵미사일 사일로를 거의 직격하지 못한다면, 적국의 핵무기가 살아남아 반격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엄청난 정밀도를 갖추도록 진화한 이유라는 것이다. 

 이 분야를 잘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당시 나도(그리고 지금도) 핵무기는 최종적인 무기라고 생각했다. 재래전이 한참 오간 다음, 갈등 수준이 고조되고, 그 상승의 끝에서 견디지 못한 일방이 핵무기를 발사하고, 그 보복으로 맞불을 놓으면서 세계적인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이 핵전쟁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일 것이고, 나도 그랬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핵무기가 저렇게 위력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 아닌가? 아니 지구를 태울 업화가 고작 탱크 10대와 콘크리트 동굴을 못 뚫어?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상한 것은 더 있었다. 핵무기는 대전략 차원에서 활용되며, 대위력이고,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공격할 수 있는 전략핵무기와 그보단 소형이고 전술적 차원에서 사용하기 위한 전술핵무기로 구분된다. 전술핵무기는 다시 핵포탄, 핵어뢰, 핵 공대공미사일, 핵가방 같은 것이 있는데, 알아보면 핵미사일은 핵미사일로 요격하고, 적의 전투기 편대는 핵공대공 미사일로 요격하는 일상적 핵사용까지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이 무기들은 최소한 이른바 "핵만능시대"에는 분명히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도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끝없이 보복하다가 공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국지적인 전투에서 사용되어 적을 크게 타격하는 정도로 기획된 무기로 보인다. 

 알아 보면 볼 수록 핵무기란 건, 일반적으로 흔히 오해하듯이 최종최후의 무기이자 인류의 끝을 반드시 갖고 오는 그런 무기는 아닌 셈이다. 핵이 인류사의 종언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인류멸망과 무관하게 핵을 군사적으로 쓸 수 있다고 믿던 자들이 제법 있었고, 그런 전략, 전술도 있었으며, 실제 우리 주변에 그런 준비들이 있던 시기도 있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13일간의 위기(`62.10월) 속 일련의 사태는 차치하더라도, 예컨대 이스라엘군이 핵을 실전 배치까지 했고, 미-소 양국이 이스라엘-아랍간 소규모 핵 분쟁이 있더라도 넘어가자고 했던 `73년 욤 키푸르 전쟁 때라거나, 닉슨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핵 공격을 지시했던 `69년 EC-121기 격추사건 같은 때가 분명히 있었다. 훈련 목적이나 오류가 아니라 명백히 핵전쟁을 염두에 둔 사건들이라 할만하다. 

 기실 `50~`80년대 미국이나 소련은 "핵을 사용하는 전쟁"을 염두에 둔 것 같아 보인다. 예컨데 소련군은 `54년에 "눈덩이 훈련"을 통해서 40kt의 핵무기가 터진 직후 그 지역을 4.5만명의 보병, 300대의 항공기, 1,200대의 기갑부대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 훈련작전을 한 적이 있고, 비슷한 시기 미군도 "사막의 바위 작전"으로 유사한 훈련을 실시했다. `50년대 후반부터는 핵무기가 날아다니는 핵 전장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부대 편제 개편("Pentomic Division") 개편과 같은 작업도 이루어졌고, `70년대 정도 되면 작전 시나리오 자체가 전장에 일단 핵무기를 붓고, 그 다음 주력군이 진입하는 식으로 짜이는 사례까지도 있던 모양이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라인강으로 향하는 7일" 계획에서는 나토가 먼저 핵 공격을 실시하고, 소련이 그에 대해 유럽대륙 서부 전역에 핵을 날리고 재래식 군대가 들어가 9일 내에 석권하는 구조로 있던 것 같아 보인다. 

 요약컨대, 일반인은 (1) 핵의 사용은 곧바로 전면 핵전쟁을 의미하는 것으로, (2) 핵 사용 자체가 매우 예외적이고, 최종적이며, 보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핵강대국의 국가원수나 군의 지도부 인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느낌이 든다. 

 핵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나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그 사용 및 통제권이 현재 당장 국가원수 아래로 내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나, 사용이 그렇게 불가능하거나, 그렇게까지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 않을까 싶어서 정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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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one year from the ratification of this article the manufacture, sale, or transportation of intoxicating liquors within, the importation thereof into, or the exportation thereof from the United States and all territory subject to the jurisdiction thereof for beverage purposes is hereby prohibited.        - The Constitution: Amendments XVIII, Section 1. (Passed by Congress December 18, 1917. Ratified January 16, 1919. Repealed by amendment 21.)



The eighteenth article of amendment to the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is hereby repealed. - The Constitution: Amendments XXI, Section 1. (Passed by Congress February 20, 1933. Ratified December 5, 1933.)

 

- Constitution of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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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는 그야말로 눈부신 시대였다. 한국사람들은 일제강점기이던 이 시절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별로 없다보니, 세계사적 사건인 1929년 대공황만 기억하기 마련인데, 이 대공황 자체가 바로 1920년대 장기호황의 끄트머리에 발생한 사건이다. 1921년부터 시작되었던 오랜 호황동안 주가는 4~5배 이상이 올랐고 임금도 적지 않은 근로자가 2~3배 이상 상승하여, 소비 확대를 향유할 수 있던 시기이다. GDP 자체가 42% 상승했고, 실업도 대체로 4% 수준에서 머물렀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미국에서 굳이 “Roaring `20s”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일만한 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1918년 1차 대전이 종료된 것이 사람들의 인식과 경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전쟁비용으로 지출되던 막대한 예산이 절감되었고, 사람들이 죽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전쟁사를 잘 모르는 현대인이 쉽게 짐작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당대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1차 대전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체제의 발달은 그때까진 상상도 못하던 대규모 병력을 모을 수 있게 해주었고, 철도기술의 발달은 병력을 놀라운 속도로 전장에 집결시키게 해주었으며, 기관총과 철조망, 콘크리트의 발달은 상상도 못하게 강력한 방어선을 선사했다. 수만명이 하루에 죽어나갔고 수십만명이 단 몇km의 구간에 집결하고 소멸되었다. 예를 들어 솜 Somme에서는 연합군이 단 9km를 진격하는데 양편에서 총 110만명 가량이 사망했다. 인간의 생명이 너무나 하찮게 사라져 염세주의적 시각이 세계를 지배하던 이 시대가 1918년 돌연 종료된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가 개인 가구에 준 경제적 선물도 작지 않았다. 각국 정부가 발행한 전쟁채권이 일반 가계에 노동외 소득을 주었고, 전쟁기간 동안 동원된 남성들을 대신해 산업 현장에 뛰어든 여성들이 소득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스페인 독감이 이 새로운 경제적 선물의 향유 시점을 늦췄다. 전쟁과 함께 전세계로 퍼진 스페인독감은 1918년부터 2~3년간 2에서 5천만명의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아직 평균수명 향상의 효과가 미미하여 고령자가 적던 시기이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숫자의 위협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고, 자영업이 추락하였으며, 경제적 위기를 함께 겪었다. 다우존스지수도 1920년만 한정해서 본다면, 1919년보다 오히려 35%나 격감한 수치를 기록했다. 다만 스페인독감은 1919년말부터 돌연 사라졌고, 그 경제적 영향이 마무리된 192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과 팬데믹 종료로 인한 낙관적 분위기와 경제적 부흥이 세계를 지배했다. 본격적인 경제적 ‘이륙’은 이 1920~1921년경에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 반복되는 현상이지만, 이 만큼 전체 주가가 급격히 상승했다면 부자도 양산되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랬다. 위대한 개츠비가 바로 1925년에 출판된 작품이고, 1922년을 배경으로 한다. 뉴욕 마천루 중에서도 눈에 띄는 디자인을 갖춘 크라이슬러 빌딩이 바로 20년대에 건축된 빌딩이다. (다만 완공은 대공황의 초입인 `30년이었다) 크라이슬러의 외관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 외장의 양식이 Art Deco, 알데코라고 흔히 일컫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를 상징하는 이 양식은 그야말로 20년대를 석권해서, 디젤펑크와 같은 ‘미국의 잘 나가던 시대’를 그리는 작품들에 반드시 등장하는 양식이 되었다. 밝고 폭발적인 색채의 대립과 함께 기하학적 형상들이 아로새겨진 건물과 내장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보통은 건축사적 유행의 변화는 매우 천천히 퍼지기 마련인데, 알데코는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럴 돈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크라이슬러 빌딩 뿐 아니라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도 이 시기에 지어졌고, 그 외에도 숱한 뉴욕의 빌딩들이 이 시기에 착공되었다. 

 

 미국인들의 눈을 장악하던 것이 알데코라고 한다면 음악은 재즈였다. 재즈의 전성기라고 할만한 시기였고,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전설적인 가수들이 이 시기에 크게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전 세대의 음악가들과 차원이 다른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무대의 질과 양이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라디오였다. 1906년 최초의 방송에 성공했던 라디오는 1920년 최초의 상업방송국으로 발전했고, 1922년 최초의 정기적인 매스미디어 예능이 라디오에서 송출되었다. `20년대는 라디오의 시대가 되었고, 라디오의 제조업, 방송업, 예능 등이 급격히 세를 불렸다. 정부의 규제당국이 처음 구성된 1927년 전까지 라디오 산업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이 무렵에는 약 40%에 가까운 미국인이 이미 집에 라디오를 갖고 정기적으로 청취하게 되었다. 최초의 방송이 시행된지 고작 20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디오는 자동차와 함께, 이 시기 일반인들이 인류문명에 대한 낙관적 기대를 강고하게 형성하기 충분했다. 1913년 미국 전체에서 단 48만대 생산가능하던 자동차는 1924년에는 연간 350만대 생산 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이 시기 전국적으로 약 1500만대의 자동차가 판매되어 굴러다니고 있었다. 가계들은 실질임금 상승과 함께 자동차 덕분에 생활 수준의 급상승을 경험했고, 모텔이나 드라이브인이 형성되었다. 당시에도 이미 고가품이었던 자동차와 라디오를 구매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할부거래’가 활성화되었고, 주가 상승과 맞물려 금융산업 발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신용거래를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라디오가 만들어준 광역권 유행과 함께, 미국인들의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가 바뀌었다. 

 

 자동차의 확산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당연히 이 시기는 정유산업의 폭발적 발전이 배경에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Standard Oil이 1911년 해체되고 만들어진 ExxonMobil , Marathon Petroleum , Amoco , Chevron 등의 회사들이 해체에 불구하고 급격히 성장했으며, 해체되었음에도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해외 유전회사들을 병합해나가던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어떤 의미로는 자원투자라는 식민경제를 대체할 새로운 모델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제2차 산업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기실, `20년대의 폭발적 호황의 배경으로 흔히 지목되는 것이 바로 이 제2차 산업혁명이기도 하다. 19세기 말부터 천천히 발달하던 통신, 정유, 철강 및 내연기관의 발달이 꽃을 피운 것이 우연히 이 `20년대이고, 그것이 대호황으로 연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시기 사람들이 기술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배경일 것이다. 

 

 기술의 혁신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 잡은 것은 바로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이었다. 1927년 “세인트루이스의 혼”을 타고 기착 없이 한번에 뉴욕에서 파리로 넘어간 찰스 린드버그는 새 시대의 기술적 혁신을 상징하게 되었고 단번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항공산업의 희망이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20년대 말에는 곳곳에서 예측되고 있던 미디어나 정유산업의 성장 둔화를 메꾸고 그 이상의 성장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들이 퍼져나갔다. 

 

 이 시기의 호황은 단순히 미국만의 것이 아니고 세계사적인 것이기도 했다. 대서양 건너 유럽에서는 이 시기를 Belle Epoch의 마지막 시기로 부르는데, 그야말로 인간에 대한 찬가가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Annees Folles라고 하는 시기인데, 마찬가지로 문화가 폭발하고 주가는 4.4배 증가했다. 넘쳐나는 돈은 유럽에서도 투르 드 프랑스를 활성화시켜 오늘날과 유사한 스테이지 구조로 안착시켰고, 다른 리그들도 부흥시켰다. 기득권이라 할만한 서구 남성들만 이 시기를 향유한 것이 아니었다.  호황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했고 억압을 약하게 만드는 법이다. 이 시기 여성 참정권이 급격히 확대되고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성화된 것은 억압의 약화 탓만이라 보긴 어렵고, 1차 대전 기간의 여성의 산업활동 등 복합적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적지 않은 식민지 지역에서 탄압이 약해진 경향이 있던 건 시대적 사조라고 보는 게 맞지 싶다. 한반도에서도 바로 이 시기가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기간이었다. 1919년 취임해 1927년까지 총독직을 맡았던 사이토 마코토는 재임기간 동안 일반경찰에 의한 식민지배를 시행했다. 통상 교과서에서는 이 시기 문화통치가 1919.3월 3.1운동의 여파로 인한 것이라 저술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세계사적으로도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완화된 식민지배를 경험했다. 식민제국들 자신이 새롭게 번지는 자유주의적 사조를 경험했고, 그 사람들이 식민기구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의 분위기도 영향을 주었다. 패전국이 보유하던 식민지를 승전국이 재분배하면서, 위임/자치통치를 골간으로 하기로 논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최소한 외양에 있어서는 유화적 식민통치로 전환된 경우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 다만, 1922년 남아공 반란 등에서도 알 수 있지만 현지 주민은 여전히 폭압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승전국 식민지에는 당초부터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흔히 퍼져있는 오해*와 달리 독일에게조차도 이 시기는 대체로 행복한 시기였다. 1차대전 패배와 그에 이은 베르사유 조약이 야기한 독일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오판이 겹쳐서, 20년대 초기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던 것이 사실이다. “식당을 들어설 때와 밥먹고 나올 때 가격이 달라서 메뉴판에 가격이 기재되지 않던”, 그리고 “아이들이 블록장난감보다는 저렴한 현찰뭉치를 쌓고 놀던” 초인플레이션은, 그러나 1924년경 종료되었다. 독일 뿐 아니라 초인플레이션을 함께 경험하던 4개국(오스트리아,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독일)은 1924년 일제히 초인플레이션의 종료를 경험하였고, 1924년부터는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독일어로는 이 시기를 Goldene Zwanziger라고 하는데 같은 의미이다. 1924년 미국에 의해 제안된 Dawes Plan에 의해 상당한 차관을 받을 수 있게 되고, 연간 배상금 부담도 감소(총액은 유지)한 독일은 경제적 부흥을 경험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이 문화적 폭발을 함께 향유했다. 

 

 * 일부에서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득세하게 된 것이 이 시기 세계적 호황에 불구하고 독일은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어서 그 반동으로 극단주의가 세를 얻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듯 독일이 침체를 겪은 것은 20년대 초반, 그리고 1929년 대공황 이후의 일이다. 나치당은 이 초인플레이션 기간(1919~1925)에 창당해 득세했고, 1923년 맥주홀 폭동까지 세를 얻었다. 그러나 맥주홀 폭동 실패로 히틀러는 투옥되었고(6개월간 복역하며 Mein Kampf를 저술했다) 나치당이 다시 확연히 세를 얻은 것은 세계대공황 이후인 1930년 9월 독일 총선에서 18%를 득표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런 호황은 다른 분야에서의 자유주의적 사조와 달리, 희한하게도 경건한 어떤 금제, 문화적 금기로 연결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가 금주법의 시기라는 점이 그러하다. 사실 금주법이라는 용어는 그 시절의 뉘앙스를 정확히 살리지 못한다. “금주헌법”의 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20부터 1933년의 기간은 Prohibition Era라고도 하는데, 종교적 경건성이 한 극단에 다달아 술 그 자체를 금지하는 규정을 “헌법”에 직접 규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글 최상단에 인용한 규정이 바로 그것인데, 미 수정헌법 제18조가 알콜의 금지를 규정한 내용이다. 이 규정은 1932년 대선에서 F.D. 루스벨트가 대통령에 개헌을 공약하고 나서 당선된 뒤에 비로소 없어질 수 있었는데 이것이 미 수정헌법 제21조의 내용이다. 1932년의 대선의 핵심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금주법이었다고 한다. 기독교 단체 등에서는 자경단을 구성하여 술을 마시거나 기타 불경한 행동을 하고 다니는 이들을 신고하고, 규제했다는 이야기마저 있다. 당연히 엄청난 반발이 축적되었고 막대한 손해를 본 양조업자와, 무엇보다 농부들이 반발했다. 술을 허용하라는 입장을 갖는 반대단체가 급속도로 형성되었다. 게다가 밀주가 횡행했고, 오래된 창고 등에 있는 술들이 발굴되었다. 합법적으로 알코올을 판매할 수 있는 의사와 약사가 엄청난 부를 모을 수 있었는데, 그보다 더 큰 부를 모은 것이 마피아였다. 이 시기는 달리보면 마피아의 시기였는데, 이들은 경제호황보다는 이 금주헌법 덕분에 밀주를 만들며 부를 모을 수 있었다. 알카포네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1910년대 초반까지는 ‘모두가 필요성을 인식했으나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술에 대한 규범적 금지를 이끌어낸 이 금주헌법은 자그마치 13년간이나 이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승리일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이는 놀라운 이야기기도 하다. 미국인들은 술도 없이 이 광란의 20년대 문화적 폭발을 일궈냈다는 것이니까. 

 

 최근 일부에서는 2020년대가 1920년대 장기대호황이 반복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듯하다. 1920년대가 1차대전의 종료, 스페인독감의 종식, 그리고 2, 30년 전부터 시작된 제2차 산업혁명의 고도화로 인해 장기적 호황을 누렸다는 분석을 토대로, 2020년대는 코로나19의 종식, IT 버블 이후 20여년간 다져온 제4차 산업혁명의 고도화가 새로운 장기호황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선 1920년대 호황이 낯선 주제인 만큼 관련하여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도록 작성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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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는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지역이다. 자락이라고 하면 오해할 수 있는데, 소백산맥 한 복판의 길다란 계곡 같은 땅에 있는 마을이다. 아침에 칠봉산에서 해가 떠서, 저녁에 속리산으로 해가 진다.  

 산골 계곡 속 좁은 땅이다보니, 역사에 남은 위인을 배출한 바도 없고, 역사의 한 장면을 차지한 일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다. 마을회관에서부터 뒤로 널찍이 마을이 퍼져있다. 거의 모든 집이 슬레이트 지붕이고, 집마다 농기구를 두는 창고를 끼고 두 채, 혹은 세 채로 되어 있다. 그래도 보통 양옥 구조라,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 악천후에 비맞고 화장실 갈 일은 없다. 담벼락은 높지 않다. 없는 집도 많다. 동네 안쪽까지 시멘트, 혹은 아스팔트로 도로가 놓여있고, 수도와 전기도 잘 들어온다. 도시 못지 않다. 다만 큰 도로를 빼면, 다른 도로에는 차선이나 노면 표시는 없다. 농번기에는 도로도 온통 흙탕 범벅이 되지만, 배수로가 도로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어서 비만 오면 다시 길이 말끔해진다. 이 길을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오토바이를 몰고 지난다. 학교가 멀기 때문에 어른들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이젠 길이 놓였지만 예전엔 칠봉산을 넘어야 학교를 갈 수 있었다. 농사가 바쁠 때면 어른들에게 잡혀 농사일을 돕기도 하지만, 그래도 학교 일과시간은 보장받는다. 자기들 어릴 땐 학교고 뭐고 모내기 도왔다는 양념이 붙기는 하지만. 동네에 에쿠스며 그랜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보다는 트럭이 많고, 트럭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은 것은 그래서이다. 오히려 흙길을 밟기 힘들다. 논밭은 죄다 흙이지만, 길은 당연하다는 듯 시멘트다. 그래서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프고 관절이 시큰 거리기 마련이다. 시골마을이 노냥 그렇듯 마을 안에도 오르막이 있는데, 그 끝에 사는 아저씨네에 들르기라도 하면 내려오는 길엔 무릎이 뜨끈해진다. 

 이 곳 사람들은 거의 다 농사를 짓는다. 농작물은 다양하다. 옛날엔 논농사도 꽤 지었다고 하지만, 땅이 좁고 강이 멀어 원래 논농사에 맞지 않았다. 이제는 밭농사가 주력이다. 한때 전국에 1백여개소 밖에 없었을 시절부터 지어오던 오랜 고사리 밭이 이 마을에 있고, 주변에 복숭아며, 감을 재배하는 과수원도 곳곳에 퍼져있다. 오이며, 호박같은 채소도 조금씩은 어느 집에선가는 부쳐먹고 있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이 잔치라도 벌일 때면 채소가 모자랄 일은 없다. 땅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씨라도 뿌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여년 사이의 큰 변화라면 역시 마을 주민이 줄어드는 것이고, 휴경지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휴경지에 가득히 태양열발전판을 깔아두었고, 놀리는 것보다는 쏠쏠하게 돈을 버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평평한 땅에 깔아야 하는지라, 하필 금싸라기같은 마을 옆 땅에 가득히 펼쳐 있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는 어른들도 제법 있다.  

 예전엔 계절마다 잔칫거리가 있었다. 명절이 있고, 경조사가 있었다. 요즘엔 결혼도 없고, 누가 죽는 일도 적으며, 아기가 적어서 돌이며 백일도 없다. 명절도 이젠 못만나던 가족끼리 모여 보내지, 동리 단위로 보내지 않는다. 잔치를 벌일 일이 없다. 대신 물산이 더 풍부해졌다. 예전 같으면 잔칫날에나 먹었던 전이며 고깃국을 매일 해먹을 수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매일이 잔치지만, 달리 보면 잔치 벌일 일이 없다. 농번기가 끝나고 추수를 마치면 마을이 다 모여서 돼지를 잡기도 했는데, 이젠 비닐하우스 때문에 농한기라고 할 것이 없다. 겨울이 다가오면 마을 사람 마을회관에 모여 배추를 절이고 고추가루를 뿌려 김장을 담궈 나눠가졌는데, 기력이 쇠한 노인이 많아 모이는 이가 적어졌다. 그래도 아직 마을에서 김장을 함께 한다.  

 인터넷 환경이 좋다고는 못할 것이다. 안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 시골마을 정보화사업으로 인터넷은 깔렸는데, 농한기에 틈틈이 거기 적응하는 사이 어느새 세상은 3G며 LTE 중심으로 넘어가 버렸을 뿐이다. 회선은 깔려있으니 차라리 인터넷은 잘 되는데, 스마트폰은 영 어렵다. 흙 묻은 목장갑 위로 터치가 잘 되지도 않고, 밭마다 과수원마다 기지국을 깔긴 어렵기에 속도도 느리다. 사실 그 정도면 된다.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들은 거간이 황령리 사람들이고, 저녁이면 알아서 마을회관에 모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스마트폰으로 연락할 필요가 없다. 급한 일이 있으면 이장이 알아서 방송으로 이야기해준다. 또한, 어른들은 도회지에 나간 친척들과 영상통화를 할 때면 우선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에서야 영상을 켜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흙밥먹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은척면에 하나 뿐인 양조장에서 만드는 은척막걸리에 자부심을 느낀다. 어른들이 도회지에 나갈 때 대량으로 사들고 들어오지만, 양조장에서 트럭으로 마을회관마다 배달을 다니기도 한다. 예전엔 아이들이 나가서 사들고 오다가 마시는 일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먼 옛날의 이야기다. 농사를 짓다보면 참을 많이 먹고, 참을 먹을 땐 항상 막걸리를 곁들인다. 첫 참이 오전 10시 경에 있으니, 도시 사람들 기준으로는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셈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름엔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그리 이르기만 한 시간은 아닌 셈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같이 참을 먹고, 다 같이 트랙터를 몰고 오토바이를 달린다. 경찰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지만 오더라도 못본 척 하기 마련이다. 막걸리와 소주를 빼고 나면, 참은 거의 옥수수며 찐감자, 김치에 말아 내는 국수 같은 것이다. 과자나 초콜렛 같은 것은 보기 드물다. 편의점은 커녕 수퍼마켓도 10km는 족히 가야 나오기 때문에, 사오려면 큰 결심을 해야 한다. 다만 이장이 마을회관에 비품으로 과자며 사탕을 사다 두려고 하는 편이다. 나이가 몹시 많이 든 노인분들은 왠지 단 음식을 몹시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특별히 불편함을 모른다. 농민의 삶은 상거래보다는 직접 만들고 직접 해먹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해하는 것은 도시에 있다가 들어간 사람들 뿐이다.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은척면 밖의 다른 시골 마을들에서는 교회가 마을 한 가운데 있어서 중심을 잡아준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마을에서는 소식을 알리고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는 것도 목사 부부가 해줘서, 이장이 훨씬 편하다고도 하던데, 황령리에선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마을 밖에 따로 떨어져 있을 뿐더러, 다니는 이도 많지 않아 중심적인 역할로 보긴 어렵다. 그래도 목사님이 마을에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유일한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이 먼저 찾아가는 일은 많지 않지만, 목사가 마을을 돌다가 이런 저런 분쟁이며, 조언을 주는 일은 종종 있다. 마을 출신 사람은 아니지만, 목사의 말을 사람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듣는 편이다. 삼성전자에 다니다 온 엘리트라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목사님 없는 자리에서 칭찬하는 일도 빈번하다.  

 어린 아이들, 젊은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젊다고 오래 이장을 떠맡아야 했던 마을회관 옆집에 사는 아저씨네에는 20대 딸 셋이 있는데, 이젠 대구며 서울에 나가 살고, 명절에나 얼굴을 들이민다. 복숭아 농사를 짓던 아랫녘 할머니 댁에도 20대 아들이 있는데, 그래도 가까이 살아서인지 주말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가끔 번잡한 도시를 떠나 아이들을 키우러 오고 싶다는, 혹은 아이를 맡기고 싶다는 자녀들이 있기는 하지만, 초등학교조차 9km가 떨어진 이 황령리에 실제로 아이를 상시 둘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20대 아들딸들도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도회지의 친척집에 나가 살며 학교를 오갔다. 아이들은 아주 어리거나, 아니면 중학생 이상은 되는 나이대 밖에 없다. 그래서일지, 마을엔 놀이터가 없다. 예전엔 필요성을 몰랐고 지금은 필요성이 없어서 없다. 집마다 수저며 그릇이 사는 사람보다 몇 벌씩 더 있기 마련인데, 명절엔 자식들 가족을 위해 꺼내진다. 하지만 평소라고 광 속에 넣어두는 것은 아니다. 언제 옆집 사람이 불쑥 찾아와서 밥을 같이 먹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들도 무료하면 불쑥 옆집에 가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두끼까지도 하고 오곤 하기 때문에 그걸 불편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다만 잠은 반드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잔다. 이웃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것만은 무례라고 느낀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쭉 살아온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이걸 편하게 느끼진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들도 친구의 집에 찾아가 똑같이 행동한다. 

 외국인은 많지 않다. TV며 다른 지역 농민들 이야기를 들으면 온통 시집 온 외국인들이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시골 마을을 가득 채우고 사는 것 같은데, 황령리에는 외국인이 없다. 은척면을 다 뒤져봐도 14명이 고작이고, 그들이 낳은 자식도 11명이 전부다. 20개 리에 단 14명이면 많다고 할 일은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어떤 어른들은 외국인이 없어서 좋다고도 하지만, 외국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아무튼 1,508명이 살고 있는 지역이니까.   

 아프면 정말로 큰일이다. 그나마 한의원은 10km 안에 하나 있지만 병원은 26km를 달려야 비로소 하나 나오기 때문이다. 옛날엔 8km 떨어진 면사무소 근처에도 작은 병원이 하나 있었는데, 원장이 은퇴한 뒤로는 다시 병원이 생기질 못하고 있다. 보건소는 그래도 10km 안에 두 개나 있어서, 어디 아이가 넘어졌거나, 농사짓다 쟁기에라도 찔리거나 하면 마을 사람들은 보건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건소며 병원의 의사는 어지간한 병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항상 간단한 항생제와 진통제만 처방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도 큰 병이 걸린 것 같으면, 차라리 멀리 도회지로 나가서 진료를 받는다. 거리로는 대전이 가깝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대구에 더 친근함을 느끼는 것 같다. 큰 병이 났을 때 주로 찾아가는 병원도 대구의 대학병원들이기 때문이다. 

 의사보다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 공무원이다. 은척면 전체에 15명의 공무원만 있고 그나마 한명은 면장이고, 다른 하나는 출장소로 따로 떨어져나가 있다. 외국 출신 신부보다 공무원이 적다. 사실, 농가의 사람들은 공무원을 찾을 일이 없다. 담벼락도 자기들이 세우고, 하천도 자기들끼리 청소한다. 등본 같은 걸 뗄 일도 별로 없다. 검사며 판사같은 높은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만날 일이 없다. 경찰서는 커녕 순경 서너명이 근무하는 파출소도 10km 밖에 있다. 국회의원이나 상주시장 선거를 해도 후보들은 황령리를 스쳐지나갈 뿐, 차에서 내려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일이 없다. 농민들 특유의 자생적 근성이 합쳐져서, 공무원들을 매우 멀게 느낀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일은 없지만 설화는 있다. 유래가 깊은 동네마다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은척면은 예로부터 은척을 숨긴 땅이라고 알려져있다. 원래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은척과 금척, 두 가지 보물이 신라땅에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는 상주, 다른 하나는 경주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구가 너무 많이 늘었고 나랏님이 견디다못해 땅에 묻으라 했는데 그래서 상주시 은척면, 경주시 금척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다 하여 한때 경상감영을 경주에 두었다가, 다시 상주에 두어서, 그래서 경-상이라고 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 시절엔 은척면 황령리에도 곳곳까지 사람이 가득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황령리 사람들은 그 은척이 묻힌 곳을 칠봉산 바로 앞 은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산 이름이 그럴 리가 있냐는 것이다.  

 경북 상주시 은척면은 한국의 읍면동 중 소멸위험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고령인구를 분모로, 2, 30대 여성을 분자로 두고 산출한 "지방소멸위험지수"가 0.2 미만이면 소멸고위험군에 속하는데, 은척면은 그 수치가 0.03으로 한국 최저치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러하다.  

 2020년 의사 집단행동 사건 전후로 인터넷에 시골에 의사를 더 보내야 한다는 당위적 이야기가 많이 도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삶의 모습을 잘 아는 것 같진 않았다. 나도 모른다. 나도 인생의 87%를 동 지역에서 살았다. (군생활도 시골에 포함하면 도시생활 비율은 82%다)  

 흔히 지식인 집단으로 꼽히는 직업군에 속한 이들일 수록 도시에 사는 비율이 높은 듯 하다. 판검사며, 교사며, 고시 출신 공무원이며, 대학연구자, 언론사 기자, 대기업집단의 정규직 사원 등은 시골에 살 일이 없거나, 살게 되더라도 일시적이다. 그런데 일단 확인 가능한 통계에서, 의사는 예외이다. 의사는 약 4%가 읍이나 면지역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산다. 자세한 통계는 없지만, 읍면에서 활동하게된 의사들이 다시 대도시로 나와서 사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의사들은 의대 동기며 선후배들과의 연락망이 갖춰져있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시골의 삶에 대해 의사들은 제법 많은 정보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의사들이 지방에 가서 안쓰럽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의사들이 어쩌면 현대 한국에서 시골의 삶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지식인 집단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에 아래 링크의 글을 보았는데, 난 굉장히 호소력있다고 생각해서 의사 지인들에게 왜 의협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반응은 제법 의외였는데, 이미 여러번했고, 당연히 아는 이야기이며, 이것이 초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들에겐 이 정도 정보는 common sense에 가깝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이런 정도의 이야기로 국가 정책 방향이 바뀔 것은 아닐 것이고, 민의가 변할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반 대중들이 이런 걸 잘 아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역시, 모르는 종류의 이야기 - 예컨대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쉽게 강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좀 더 자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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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체증이 심한 도시의 교통정책으로 오히려 도로를 좁히고 주차공간을 줄이면 사람들이 차를 몰고 나오지 않아 교통체증이 줄어들 수 있다는 이론적 접근이 있다. 도로를 넓히고 주차를 쉽게 만들어주면 사람들이 더 많이 차를 사고, 더 많이 개인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

 

산불이 나면 진화하지 말고 오히려 어느 정도 방치해 둬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은 산불들을 매번 다 끄니까 숲에 마른 낙엽이나 나뭇가지, 덤불들이 사라지지 않고 모여서, 나중엔 오히려 끌 수 없는 거대한 산불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평소의 산불은 큰 나무는 타지 않기 때문에 동물들이 숨을 수 있고, 잔 나무와 덤불이 타서 숲에 영양을 공급하지만, 그런 거대한 산불은 큰 나무마저 태우기 때문에 동물들도 죽게 만들고 흙 속의 씨앗까지 모두 죽인다는 논리이다.

 

직관과 정책이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자신의 가치를 창의력 면에서 증명하고 싶어하는 학자, 관료, 정치인들이 항시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간간히 그것이 진정 훌륭한 조언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현대의 거시경제정책 그 자체가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케인즈 전까지는 경기침체기의 정부재정도 적자를 최소화하자는 관점이 주류였다면, 그 이후에는 정부지출 확대가 대안이라는 관점이 주류가 되기도 했으니까.

 

영국과 일본 정부는 이번 COVID-19에 대해 꽤 직관과 다른 접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전염병 방역엔 초점을 두지 않고, 어느 정도 병이 퍼지게 두겠다는 취지로 보인다. 전염성이 높은 병이라 막는 과정에서 의료인력과 자원이 과도하게 소요되어 중증 환자에게 투입되지 못하게 하고, 경제사회적으로 극심한 침체가 야기될 수 있다는 관점인 듯 하다. 아울러 전염병을 그냥 지연만 되게 하고 중증환자만 치료하면, 발병량 자체는 늘지 몰라도 막는 것보다는 의료자원을 절약하면서 조기에 종식할 수 있다는 논의로 보인다. 이게 옳은가? 한국에도 유사한 이야기를 하는 의료전문가가 있는 것 같고, 최소한 일본 네티즌들은 이게 옳다고 믿는 것 같아 보인다. 난 판단이 안되는 분야니 일단은 그런가보다 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참고로, 도시계획을 할 때 정말로 도로를 좁히고 주차공간을 줄인 도시가 있다. 내가 그 도시에 사는데, 거의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이 도시는 대중교통이 부족하고, 도시가 청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으며, 가족단위 구성원이 많아 쇼핑 물량이 많은 등이 원인이라고 보인다. "직관과 어긋난 혁신적 대안"이란 게 항상 옳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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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의 용광로는 두 달에 한번씩 정비를 위해 점검을 한다. 항시 용광로를 향해 불어넣어지는 고온, 초고압의 바람도 이때만은 멈춘다. 그렇지만 용광로 자체가 꺼지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불을 일부러 끄는 것은 아니며, 1500도에 달하는 쇳물 온도도 낮아지긴 할 지언정 어느 정도 유지된다. 용광로를 아예 끄면 어떻게 되는가? 제철업계 주장에 따르면, 용광로를 닫고 4~5일 경이 지나면 용광로가 사실상 정지된다고 한다. 이 경우, 용광로를 재가동하려면 5개월 여가 걸리며, 용광로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 안에서 녹아있던 쇳물이며 체계적으로 쌓아둔 코크스, 소결광 등이 용광로 벽에 눌러붙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철소는 수요 감소가 있다고 해도 용광로를 쉽게 끌 수 없다.

 

경기 침체라는 건 생각해보면 희한한 현상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건물이 있고, 기계장비가 있으며, 여전히 원재료가 있고, 숙련이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 있다. 모든 실물이 그대로인데, 주가는 폭락해 기업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경제가 돌아가지도 않는 것이 불황이다. 작금의 위기는 그래도 어제와 다른 상황 (전염병 위기)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더 이해가능성이 높은 위기이긴 하다. 대신, 생산능력 자체가 하락한 상황(노동공급이 단절)이기 때문에 해결도 더욱 어렵다는 것이 한계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도 계속 돌아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 이야기한 철강업이 대표적인데, 현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면 미래의 경기회복에 대비해 제철 능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당장의 손실에 불구하고 용광로를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끄면 다시 켜는데 너무 오래걸리니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곳곳을 뒤져보면 이런 산업이 더 있을 것이고 그런 걸 찾아내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에 덧붙여 업종 자체가 특별한 고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농업이다. 농업은 업종 전체가 사실상 "특정 시기"를 놓치면 짧게는 3~4개월에서 길게는 1년치 산출물이 급감하는 성질을 갖는다. 예컨대 벼농사에서 4월은 파종기인데, 만에 하나 이 시기에 농촌까지 코로나-19가 퍼져 농사에 지장이 있다면 금년 쌀 산출은 급감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농촌은 인구밀도가 낮고, 농가별 동선 등이 겹치는 일이 (기업 사무직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비교적 정상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수확기이다. 수확기에는 인근지역 거주 노인, 외국인 노동자(고용허가제), 계절근로(방문), 등이 투입되어 농사일이 진행되는데, 이런 인력의 유입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이 수확기인 양배추 등 야채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의외로 상당할 수 있다. 경기 침체 상황에 엉뚱하게 식자재 가격 상승이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총공급 충격 시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쳤을 때 나올 수 있는 부작용과 별개로) 1국에 닥친 위기라면 해외 농산물 수입으로 해결할 수도 있긴 할 것인데, 지금이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도 의문이고.

그런 걸 고려할 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농업에 인력을 투입할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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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초 일본 경제를 총괄하는 대장성은 매년 10% 이상 오르던 일본 전역의 부동산 가격이 심지어 16.7% 더 올랐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전년 대비 주택가격 68.6% 상승이라는 기록을 보인 `88년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대장성이 `89년 한해 동안 여러차례 정책금리를 높이면서 세금도 높여왔음에도 여전히 잡히질 않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88년까지 1%대에 달하던 정책금리는 `90년 초에는 이미 5%에 다다르고 있었다.

 

부동산도 기본적으로 자산인만큼 수요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동하는 것이다. 다만 부동산은 수요(매년 새롭게 집을 장만하려는 사람만 실수요자로 치더라도)에 비해 '좋은 위치의 공급'은 적은 특성이 있다. 정책적으로 신규 물량을 아무리 공급하더라도(=신도시를 짓더라도) 기본적으로 '덜 좋은 위치의 공급'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때문에 경제성장기에는 대체로 가격도 함께 오르는 법이다.

 

그런데 일본의 당시 상황은 그렇게 설명할 것이 아니었다. 이 당시 일본은 미국과의 무역 분쟁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외교안보적으로 강하게 일본을 압박했고, 엔화가치를 올리라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85년 플라자 합의로 이어졌고, 인위적으로 엔화 가치가 높아졌다. `86년에는 경제성장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강력한 금리 인하와 거대한 규모의 공공투자를 계획해야 하였다. `85년 플라자 합의 시점에서 GDP가 약 1,500조원 수준이던 일본은 `91년부터 공공개발사업에 10년간 3,50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고 이것이 경기 팽창에 대한 기대로 돌아온 것이었다. 투기가 팽창되기 시작했고,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부호가 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동산에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고, 사람들은 높아진 부동산 가격을 배경으로 더 큰 액수의 담보대출을 받아 부동산을 다시 구매하였다.

 

일본 엔화가치 상승은 무역감소로 연결될 것이고 그것이 경기침체로 다가올 것은 자명했지만, 눈 앞의 자산가격 상승이 사람들의 눈을 흐렸다. 이 시점에서 부동산 열풍은 광기로 변해서 일본 전역에 리조트며, 호화주택을 지어대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85년 전체 대출의 7.5%에 불과하던 부동산 대출은 `89년 시점에는 10.7%에 달하고 있었다. 총량 자체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다. `85년 금융기관의 부동산대출 총액은 200,917억엔이었는데 `89.12월에는 469,019억엔으로 4년만에 2배 이상 높아져 있었다. 금융기관 외의 대출(개인간 대출 등)을 고려하면 문제는 훨씬 심각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엄청난 부동산 자산을 바탕으로, 기업과 개인들은 막대한 대출을 뽑아내어 미국의 부동산과 기업을 사고 있었다. 일본인이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록펠러센터를 비롯한 랜드마크들을 줄줄이 구매했고, 각종 영화사 등 주요 기업도 연이어 구매했다. 일본 각지의 미술관, 박물관에 깔려있는 피카소며 고흐의 미술품도 이때 대거 구매된 것이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농담이 횡행했다. 일왕이 사는 집 (일본 내부에서 이른바 '皇居'라고 하는 곳)의 추정 지가가 LA 전체 지가보다 높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건 국가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첫째로 일본의 경제적 역량이 너무 과도하게 부동산에 쏠리고 있었다. 금융자산은 기본적으로 기업의 투자나 연구 등에 투입되어야 경제 생산성을 지속 개선할 수 있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개인이나 기업 관점에서는 부(wealth)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지만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별다른 효율성 개선을 가져오지 않는다. 어찌보면 이 시점 일본은 '미래를 차입해서 지금 부유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둘째로 일본 서민들의 불만이 위험수준까지 증가하고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부동산을 갖고 있던 자들과 아닌 자들 간의 자산 격차가 너무 커졌고,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해진 서민들은 강한 불신감을 국가와 사회에 보이기 시작했다.

 

셋째로, 일해서 저축하여 돈을 모으는 것에 대한 경시와 경멸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당시 물가상승율은 2~3% 수준이었고 엔고로 인해 임금의 구매력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론과 주변에서 온통 부동산으로 수천만엔, 수억엔을 번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임금이나 저축의 상대적 가치가 낮아졌다고 인식되던 것이었다.

 

넷째로, 지방과 도시 간 격차가 너무 커지고 있었다. 이런 땅값 상승도 농촌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의 빌딩 한채가 시골의 한 현의 땅값에 맞먹는다는 농담마저 돌기도 했다. 자연히 지방에서는 도시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다섯째로, 정책에 대한 불신이 너무 심해지고 있었다. 대장성이며 국토청은 이미 `86년부터 부동산 가격 잡기에 나섰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여섯째로, 금융 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부동산가격은 오르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이는 은행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대출은 은행의 전체 대출의 10% 수준이긴 했지만, 대출 건건을 보면 상황이 달랐다. `85년까지 은행은 부동산 가격이 1억엔이면 6천만엔 정도만 대출해줬었다. `90년에는 1억엔짜리 부동산에 1억2천만엔까지 대출하고 있었다. 부동산이 당연히 오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정부 내에도 이미 저금리와 엄청난 규모의 유동성이 문제라는 인식은 있었다. 허나 플라자합의로 인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가 더 컸고, 따라서 부동산 폭등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한동안 금리를 높이진 못했다. 오히려 국토청이 부동산 단기차익에 중과세를 부과하기로 한 직후에 대장성이 금리를 0.25%p 낮춘 사례도 있었다. 초기에만 해도 대장성은 부동산보다 경기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라자 합의 등 연이은 미국의 통상압력의 결과가 오히려 미국의 기업과 부동산 구매로 이어진 상황이 주는 우월감도 일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여하튼 부동산은 `88년부터는 이미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부동산에 쏠리는 유동성만이라도 줄이자고 대장성은 실수요자 중심으로만 대출해주도록 은행에 협조를 요청하고, 조사, 지도도 실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은행의 이윤추구 성향을 막을 수 없었고, 막대한 물량(그것도 급격히 늘어나는)의 대출을 하나하나 심사할 방법도 없었다. 대장성과 국토청은 세금 인상으로 대응했다. 사실 세금 인상은 매력적인 대안으로 보였다. 버블 대책은 근본적으로 유동성 감소와 금리 인상이어야 하는데 이는 경기침체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선택하기 힘들었다. 반면 세금 정책은 ① 문제가 된 자산 유형에만 원포인트로 적용될 수 있고, ② 전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며, ③ (재정관료들이 항상 걱정하는) 재정건전성 개선에도 유리했다. 이에 당시 일본은 보유세와 양도세를 모두 대폭 인상하였다. 덧붙여 공시지가도 크게 현실화하였는데, 사실상 세금 인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문제는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부동산은 몇천만엔, 몇억엔이 오르고 있었으며 가격의 120%가 대출되는 상황이었다. 세금을 아무리 높여도 번 돈의 100% 이상을 징세할 수 없는 이상 돈은 여전히 부동산으로 쏠렸다. 이 지경으로 가다보니 국토청 내부에서는 대장성에 대한 불만도 높아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동성을 늘리고 금리를 낮춰 문제를 만든 건 대장성인데, 그런 원인 해소는 없이 사후적인 정책수단만 갖춘 국토청만 쪼고 있다는 식이다. 국토청은 공급 확대를 위해 대규모 택지개발 계획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었는데, 택지개발구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 택지개발에 따른 유동성 추가공급 등이 다시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기까지 해서, 그런 우려가 없는 도쿄만 매립계획 같은 대책마저 발표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지가상승감시구역' 제도도 도입해 관리하고 있었으나, `90년 초에 이르면 사실상 전국의 모든 도시지역이 이 '감시구역'에 해당하고 있어서 행정력의 한계마저 겪고 있었다. 국토청은 대장성을 더 강하게 압박하였다. 아마도 국회와 언론에서도 대장성을 압박했을 것이다.

 

결국 대장성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문제의 원인이 유동성이면 금리를 높이고 유동성을 제거해야 했다. 은행이 부동산에 덜 개입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89년부터 `90년까지 일본은행을 통해 총 5번 금리를 높여 2.5%이던 일본은행 정책금리를 6%까지 높였다. 덧붙여 시장의 금융기관들에게 대장성 은행국장의 명의로 서신을 보냈다. 부동산 대출증가율을 총대출증가율 범위 이하로 낮추고, 대출 실태를 모두 보고하라는 요구였다. 이것이 바로 '부동산 융자 총량 규제 不動産 關聯 融資總量 規制'였다. 이 통지에 따라 은행들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던 부동산 대출상황을 고려, 비율을 맞추기 위해 일시적으로 부동산 대출을 사실상 중단했다.

 

효과는 강력했다. 새로운 수요의 싹이 잘린 것이다. 엄청난 자산을 자랑하는 기업과 개인들조차도 그 재산의 대부분은 부동산과 주식의 형태였고, 새로운 부동산을 사려면 담보로 차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차입을 막았고, 돌아오는 어음 환수나 세금 납부를 위한 급매는 나오기 마련이며, '공급이 작아서 생기는 가격 급등'현상이 급속도로 실종되었다. 사실, 효과가 너무 강력했다. 가격 급등이 실종된 것에 멈추지 않고 가격 급락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부도 위기에 처한 자들이 급매물의 가격을 계속해서 낮춰서 팔려고 했지만 대출이 없어서 그런 가격에도 팔리지 않은 것이다.

 

대장성도 이럴 우려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던 것 같다. 주전住專이라고 불리는 주택금융전문회사(2금융권에 속한다)와 농협의 부동산담보대출은 애초에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락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둔 것이라고 할 것인데, 부동산 급락은 막지 못하면서 오히려 폭발은 키우는 장치가 되어버렸다. 대출총량 규제에서 제외된 탓에 대출 수요가 주전으로 몰려든 것이다. 주전의 대출총액은 `90년만 해도 3조엔 규모였는데, `95년이 되면 11조엔에 이르는 규모로 팽창했다. 그럼에도 부동산 급락은 막지 못했고 (당초 금융기관의 부동산 대출 '증가액'만 연간 수조엔 규모였던 걸 고려하자), 급락으로 금융기관의 담보들이 부실화되면서 대장성 권고를 철회(`91년 12월경)한 후에도 금융기관들이 대출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주전의 대출만으로는 충분한 대출물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버블은 호랑이를 탄 기세와 같아서, 일단 멈추면 그대로 위기로 전환되는 법이다. 주전의 대출 중 8조엔이 불량으로 판단되었고, 그 중 5조엔은 어떻게 해도 부실채권으로 남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일본 사회의 뇌관이 되어버렸다는 평가가 내려졌고, 대장성이 매 순간마다 판단을 그르쳤다는 일본 사회의 담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약 1천년간 유지된 '대장성'은 '재무성'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주요 관료들이 검찰에 입건되는 신세가 되었다. 예산권도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빼앗겼고, 금융감독권은 금융감독청을 신설해서 넘겼다. 재무성에는 재정정책기능만 남게 되었다.

 

책임있는 관료들은 문책했지만, 상황이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장기불황이 시작했다. 자산의 압도적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이 팔리지 않고, 팔려도 급락한 가격으로만 거래되기 때문에, 그리고 대출액은 여전하기 때문에, 사회 전체가 부실화되어 버렸다. '월급 모아서는 살 수 없는 부동산 가격'은 이제는 '월급 모아서는 갚을 수 없는 대출'로 변해버렸다.

 

`90년대 당시 국토청에 있던 관료들의 이야기를 보면 부동산 버블기 정책에서 결국 관건은 기존 물량이 적절히 시중에 흘러나올 수 있게(공급관리) 하면서, 투기성 수요를 저감하는(수요관리) 금리나 유동성 관리를 해주는 것이 관건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대규모 국채를 발행해서 금융기관에 남는 유동성을 정부가 흡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거래를 제한하더라도 실수요자는 있기 마련이므로, 적은 공급량이 오히려 가격 급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이 '경제지리' 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신규 물량을 아무리 공급해도 그건 외곽지역의 이야기이기 쉽고, 외곽지역의 부동산이 흔해지니 반대로 코어지역에 더 수요가 쏠리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한국으로 치면 강남 부동산가격이 더 높아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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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가 최소한 1회는 임대계약을 갱신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경우 임대비 상승폭도 5% 이내로 제한하는 법률이 재산권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다.

 

법률에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침해에 해당하지 않으려면 본질적 부분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 부분에 대한 논의가 있는 모양인데, 본질적 부분에 대한 침해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이번 법개정 특성상 조만간 누군가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할테니 헌재의 판단이 나올 것이고, 좀 다른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 제13조 ②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을 받거나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제37조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행위 중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있는 것이 토지조사사업이다. 당시 조선인들이 갖고 있던 토지를 강제로 빼앗기 위해 진행되었다고 알려져있기도 한데,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연계되어서 조선에 이주하는 일본인들에게 땅을 주기 위한 정책들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다만 이는 초기의 연구 등에서 주로 주장되던 논의였고, 근자에는 말 그대로 소유권을 조작한 사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히려 근래의 연구에서는 토지조사사업이 다른 맥락에서 수탈적이었다고 주장되고 있는데 바로 '소작권'의 부정이다.

 

조선시대까지는 토지에 대한 재산권은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먼저 산의 소유는 대체로 금지되어 있었다(「경국대전주해」 형전 추관사구 금제, 「추관지」 등). 논 밭의 경우에는 당연히 소유권이 있었는데, 여기에 관습적으로 도지권 賭地權이 인정되었다. 도지권이란 '그 땅을 사용할 권리'로 요약할 수 있는데, 작물을 무얼 심고, 토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을 정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였다. 도지권은 토지소유권자가 토지를 매매나 증여해도 소멸되지 않았으며, 도지권 자체도 상속하거나 거래하는 경우마저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적 의미에서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은 소유권과 사용권의 병합이며, 부동산임대계약은 일정 기간 동안의 사용권의 제공이라고 본다면 조선시대에는 부동산 재산권 자체가 이분화되어 있던 셈이다.

 

그런데 토지조사사업으로 일제가 전국 토지를 조사하면서 이 구조를 바꿨다는 것이 문제였다. 첫번째로 임야의 소유권을 정해줬다. 무주공산은 국유지로 편입했고, 특정 가문이 선산으로 사실상 관리되던 산은 그 가문의 소유권을 인정해줬다. 두번째로 소작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토지소유권을 일원화하여 이른바 일물일권 一物一權을 실현했는데, 이에 따라 일본인이 안정적으로 지주로부터 토지를 구입하여 임의로 소작인을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 소작인들은 사실상 매년 소작계약을 갱신해야 했고, 경제적 상황이 보다 불안정하게 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서 일제에 의한 수탈이 용이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한반도의 토지가 자본화 capitalization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진 것도 사실일 것이다. 에르난도 데 소토 hernando de soto의 「자본의 미스터리 - 왜 자본주의는 서구에서만 성공했는가」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맹아기에 반드시 필요한 건 일종의 유동화한 자산 Asset Securitization, 즉 자본이다. 생산체계 확충 등에 투입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자본이 필요한데, 서구든 비서구든 전근대에 이미 방대한 양의 자산(특히 부동산)이 존재하고 있지만 법제도적으로 비서구 지역에서는 이를 동원할 수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서구지역에는 자산의 소유권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으로서의 법제도가 아예 없거나, 혹은 하나의 자산에 다층적인 권리가 동시에 존재해서 거래 가치가 사실상 없어서 자본화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에는 어떤 의미로는 일물일권 一物一權적 방식의 재산권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가 있다, 라고는 할 수 있지 싶다.

 

그런데 현대 대한민국 수준의 경제상황을 갖춘 사회에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주택 시가총액은 약 5,056조원(`19년 기준)이고, 전체 국부 National Wealth는 1경 6,621억원 규모다. 주택 자산으로 대표되는 부동산의 다층적 재산권화로 인해 자본화가 설령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그 외의 자산 규모가 이미 적잖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미 2년 관행으로 이뤄지고 있던 부동산임대계약을 4년으로 하는 것이 본질적 부분을 훼손하는 것인지 의문이 있는 점, 부동산 거래를 제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경제성장에 따른 이익을 부동산 소유주가 대부분 가져가는 것이 위험감수자가 이익을 가져야 한다는 '자본주의 원칙'과는 상이한 점이 많다는 주장도 있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꼭 내가 세입자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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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는 `97년말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를 `98년에 매우 크게 받았다. 한국도 피해가 컸다, 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좀 궤가 다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정권이 무너지고 학살극이 벌어졌다. 국가가 파산할 지경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끝모르고 추락하는 경제적 위기는 결국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시민들은 인도네시아 자산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중국계 시민들에게 울분을 풀었다. 중국계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98.5월 한달여간 1천여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건 이상의 강간 신고가 있었으며, 수천억원 규모의 재산 손실이 있었다. 수만명의 중국계가 외국으로 탈출했다고 알려져있다. 이 시기 자카르타 전역이 통제에서 벗어났으며, 1967년 취임하여 장기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던 수하르토가 그 여파로 결국 그 5월에 퇴임하게 되었다. 하반기에는 동티모르가 다시 독립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분쟁이 격화되어 이듬해에는 결국 동티모르 학살로 연결되었다.

 

이 인도네시아가 `98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13.1%이다.

 

소련은 세계의 양대 열강으로 약 40여년을 군림하다가 어느 순간 돌연 해체되었다. `91년 8월, 공산당 전통세력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연금되었고, 모스크바에 탱크가 진입한 뉴스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옐친과 시민들이 나섰으며,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 거리를 메우고 바리케이트를 쌓았으며, 쿠데타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각 지역도 속속들이 쿠데타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며, 전세계가 옐친을 지지했다. 쿠데타군은 실각하고 고르바초프는 풀려났으나 이미 주도권은 옐친에게 있었다. `91.12월 말, 결국 소련이 해체되었고 독립국가연방이 수립되었으며,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제도 변화는 너무 큰 비용을 가져왔다. 5백만명 수준에 이르던 소련군이 급격히 해체되어 민간으로 돌아와버렸고, 군에 남은 이들도 하루치 밥값에 겨우 닿는 급여만 받을 수 있었다. 평균수명이 10년이 낮아졌으며, 초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땅과 공장의 주인을 총으로 정하는' 경우마저 나타났다. 질병과 사고, 도피성 이민 등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가 감소했다.

 

이 러시아가 혼란의 중심이던 `92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14.5%이다.

 

중국은 냉전기 초반 빈곤 상태에 있던 국가를 빠르게 산업화하길 원했다. 청나라 시절의 강성함을 되찾고 싶었음이고, 실제로 지배이론이었던 맑스-레닌주의적 이념에서는 사회주의 체제국가에서 빠른 산업화가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냉전의 상대진영 중 2위의 경제대국이던 영국을 7년만에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했고, 당시 지도자였던 모택동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업 대증산 계획 정책을 마련해 추진했다. 훗날 대약진 운동이라 불리는 정책이었다. 참새를 모두 잡아댔고, 각지의 농촌 마을에 작은 용광로를 마련하게 했으며, 자영농과 부농의 토지를 취합해 농업을 집단화했다. 그 과정은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4천만명 이상이 굶고 병들어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실상 중국의 지방이 보유한 산업역량이 모두 비효율적인 용광로로 변모되었다.

 

이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1962년 당시 중국이 경험한 GDP 상승율이 -16.2%이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위에 떠 있는 나라"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산유량이 많았고, 그 원유 수출을 기반으로 정부재정을 편성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산유국이 마찬가지니 특이할 바가 없는데, 균형재정이 달성 가능한 기준유가를 121달러로 맞췄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2014년 국제유가는 연초 110달러 수준에서 50달러 수준으로 급락했고, 이후에도 계속 하락했다. 게다가 이 유가하락은 셰일가스 개발 성공에 따른 것으로, 항구적일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왔다.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이미 `14년부터 물가와 환율이 급격히 망가졌고, 마트와 백화점에 상품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한국인들의 뇌리에 남은 기억도 이때의 뉴스들일 것인데, 급기야는 물가상승율이 400~500% 수준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2019년에는 정치위기도 같이 번지게 되었다. 대립대통령이 취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세계가 두 대통령 중 하나를 지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무장병력이 상대 세력의 요인들을 테러하거나 암살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내전가능성마저 점쳐졌다.

 

이 `14년부터 `20년까지 베네수엘라가 경험한 최악의 GDP 상승율이 -24.4%이다.

 

시리아는 중동의 봄 끄트머리였던 `11년 3월 시작한 내전에 아직까지 시달리고 있다. `12년과 `13년 가장 격렬하게 내전이 있었으며, 수도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전 지역이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힘겨루기에 휘말렸다. 약 20~30만명이 내전에 병력으로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300만명 이상이 해외로 나가 난민이 되었으며, 국내 난민을 포함하면 약 1천만명의 시리아 국민이 난민으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내전 발생 전 2,200만명이 살고 있던 나라였다. 시리아 정부는 서구와 아랍에 의한 경제 제재로 인해 수출입이 막혀 군대에 월급조차 주지 못하고 있고, `13년부터는 '군대가 군 자금을 지역에서 징발'하는 것을 허용했었을 정도로 전근대적 모습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 시리아가 `12년과 `13년 경험한 GDP 상승율이 -26.3%이다.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9.11. 테러로 민감해져있었던 미국에 의해 공격받아 국가가 무너졌다. 2003년의 일이다. 30여만명의 다국적군이 투입되어 2주만에 수도가 함락되었고, 약 1만5천명의 이라크인이 사망했다. 이후 바트당 잔당을 직장과 사회에서 쫓아내는 조치 등이 이어졌고, 이라크는 혼란에 빠져들어 이후 내전으로 연결되었다. 기간시설은 모두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곳곳에서 종파분쟁과 테러와 분란이 일어나 수천 단위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어떤 추정에는 3년만에 20만명이 죽었다고도 했다.

 

이 이라크가 `03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33.1%이다.

 

금년 2분기 코로나19를 경험한 미국의 GDP 성장율은 -31.7%이다. 일본은 -27.8%이고, 영국은 -20.4%이며, 독일은 -9.7%이다. 아울러 이 수치는 이들 선진국이 2차대전 이후 경험한 최저치이며, 그 이전엔 비슷한 수치조차 경험한 바가 없었다. 추정에는 미국이 1929년 대공황기 경험한 GDP 성장율도 -12.9%라고도 한다.

 

위 내용은 엄밀한 비교는 아니다. 명목과 실질값을 엄밀히 나눠 본 것도 아니고, 연간과 분기의 차이도 있다. 수치를 보고한 것이 독재정부 당국인 경우가 많아, 조작된 수치일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GDP 성장율에 대해 한 추정을 할 수 있도록 정리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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