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TV에서 "왕이 된 남자, 광해"를 하길래 보고 잤는데, 좀 궤가 안 맞는다 싶었다. 내가 뭐 사학 전공자는 아니니 잘은 모르지만 복식이나 가구들은 굉장히 고증을 잘한 거 같은데, 거기에 비하면 이렇게 정치나 사회적 배경 검토를 제대로 안했나 싶;; 아니면 제대로 한 것인데 걍 평 들이 그걸 제대로 못 읽고 엉뚱하게 반응한 걸지도?

혹시 아직 안봤는데 추후 볼 양반이 계시다면 스킵해주세여...

1. 굳이 유교적 관점에서 평을 내린다면 짭광해가 폭군이고 진광해는 폭군이 아니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짭광해는 어쨌든 토의와 협의라는 과정이 없이 부르짖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자기 주장만 강행했고, 애초에 다른 거 다 떠나서 유생들 밟으면서 지나간거 하나만으로도 왕망, 동탁 수준 아닌가... 진광해는 그런 거에 비하면 협의도 하고 절차 밟을 거 제대로 밟았고...

2. "역모"가 연루된 점 하나를 빼면 중전의 거취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신하들이 저렇게 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실제 조선 역사에서도 중전 문제와 같은 "왕의 사생활"에 대한 문제에 대해 신하들이 강경한 말을 많이 뱉긴 했는데, 왕도 또한 "나의 집안" 문제로 간주하고 강하게 대응한 편이다. 저건 신하들이 중전 폐위하러 내몰라 말한다고 왕이 반드시 받아줄 이유도 없다. 다만 문제는 역모... 국문장에서 그냥 역모꾼을 풀어놔줘버리면 근데 그걸...

2-1. 아니 근데 세상 어떤 외척이(정의상 외척은 아니고 처가..지만..) 왕을 내몰려고 그래?;

3. 서인들이 나중에 들고 일어서려는 부분에서 보면 꽤 의아한 구석이 좀 있다. 대신급의 신하를 다짜고짜 왕이 잡아가두고 주리를 틀었다면 당연히 그건 신하들이 들고 일어날 수 있는 건이다. 이건 조선 아니라 명나라였어도 그럴 건데, 그게 쿠데타의 명분으로는 약간 약하다. 하물며 왕의 수라간에서 바로 시비 한명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는데, 명분으로 보면 짭광해가 다짜고짜 상궁 한명의 자백만으로 대신 가둔 것도 문제는 있긴 해도 그래도 짭광해가 좀 더 많이 갖고 있는 거 아닌가.

3-1. 그러므로 가짜 왕이므로 처단한다, 라는 게 중요한데 그건 대신들 몇만 공유하고 말 일이 아니라 같이 쳐들어갈 병사들, 그리고 궁을 지키는 시위들에게도 공유되어야만 성사가 될 그런 종류의 일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언론전이 그 앞에 오갔을테고 그 언론전에서 싸우는 게 먼저였어야 하는 거 아닌가?

4. 명분론, 사대론이 논란의 여지가 많긴 한데 외교적 타당성 이런 건 다 떠나서, 광해군 집권기 시절에 놓고 보면 명나라 편을 드는 게 반드시 실리를 버린 것만은 아니었다.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의 2만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의 이름은 사르후 전투이다. 누르하치의 후금은 이 전투에서 압승함으로써 만주 지역의 패권을 쥐었고 나아가 중국 전토를 장악했다. 달리 말하면 이 전투에서 후금이 졌다면 후금은 그런 입지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르후 전투에 투입된 전력이나 전략적 상황은 후금이 압도적으로 불리했고, 후금은 당시 멸망을 생각해야할 상황이었다. 심지어 사르후 전투의 승리로 만주 지역을 후금이 병탄한 뒤에도, 명나라가 멸망하는 바로 그 날까지 후금은 산해관(산후이관, 북경에서 300km 가량 떨어져있는 만리장성의 한 부분)을 한번도 넘지도 못했다. 만일 조선이 당시에 후금 편을 들거나 엄정 중립만을 외쳤다가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가 패권을 잡으면 어떤 후폭풍이 닥칠줄 알고 그러나. 다만 현실적으로 명나라가 재정상 위기였던 것은 보이는 현상이었고, 내홍(각종 반란군. 이자성의 반란군이 바로 명나라를 멸망시켰다)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으니 최소한 만주는 후금이 장악할 것으로 볼 수도 있었고, 그런 관점에서 후금에게 기우는 정책을 어느 정도는 펴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실리론이다. 다른 게 아니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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