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의 용광로는 두 달에 한번씩 정비를 위해 점검을 한다. 항시 용광로를 향해 불어넣어지는 고온, 초고압의 바람도 이때만은 멈춘다. 그렇지만 용광로 자체가 꺼지는 것은 아니다. 내부의 불을 일부러 끄는 것은 아니며, 1500도에 달하는 쇳물 온도도 낮아지긴 할 지언정 어느 정도 유지된다. 용광로를 아예 끄면 어떻게 되는가? 제철업계 주장에 따르면, 용광로를 닫고 4~5일 경이 지나면 용광로가 사실상 정지된다고 한다. 이 경우, 용광로를 재가동하려면 5개월 여가 걸리며, 용광로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한다. 그 안에서 녹아있던 쇳물이며 체계적으로 쌓아둔 코크스, 소결광 등이 용광로 벽에 눌러붙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철소는 수요 감소가 있다고 해도 용광로를 쉽게 끌 수 없다.

 

경기 침체라는 건 생각해보면 희한한 현상이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건물이 있고, 기계장비가 있으며, 여전히 원재료가 있고, 숙련이 있는 사람들도 그대로 있다. 모든 실물이 그대로인데, 주가는 폭락해 기업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경제가 돌아가지도 않는 것이 불황이다. 작금의 위기는 그래도 어제와 다른 상황 (전염병 위기)이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더 이해가능성이 높은 위기이긴 하다. 대신, 생산능력 자체가 하락한 상황(노동공급이 단절)이기 때문에 해결도 더욱 어렵다는 것이 한계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도 계속 돌아가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 이야기한 철강업이 대표적인데, 현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면 미래의 경기회복에 대비해 제철 능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고, 당장의 손실에 불구하고 용광로를 돌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끄면 다시 켜는데 너무 오래걸리니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곳곳을 뒤져보면 이런 산업이 더 있을 것이고 그런 걸 찾아내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에 덧붙여 업종 자체가 특별한 고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농업이다. 농업은 업종 전체가 사실상 "특정 시기"를 놓치면 짧게는 3~4개월에서 길게는 1년치 산출물이 급감하는 성질을 갖는다. 예컨대 벼농사에서 4월은 파종기인데, 만에 하나 이 시기에 농촌까지 코로나-19가 퍼져 농사에 지장이 있다면 금년 쌀 산출은 급감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농촌은 인구밀도가 낮고, 농가별 동선 등이 겹치는 일이 (기업 사무직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비교적 정상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수확기이다. 수확기에는 인근지역 거주 노인, 외국인 노동자(고용허가제), 계절근로(방문), 등이 투입되어 농사일이 진행되는데, 이런 인력의 유입이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이 수확기인 양배추 등 야채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의외로 상당할 수 있다. 경기 침체 상황에 엉뚱하게 식자재 가격 상승이 같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총공급 충격 시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쳤을 때 나올 수 있는 부작용과 별개로) 1국에 닥친 위기라면 해외 농산물 수입으로 해결할 수도 있긴 할 것인데, 지금이 그럴 수 있는 상황인지도 의문이고.

그런 걸 고려할 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농업에 인력을 투입할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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