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상주시 은척면 황령리는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지역이다. 자락이라고 하면 오해할 수 있는데, 소백산맥 한 복판의 길다란 계곡 같은 땅에 있는 마을이다. 아침에 칠봉산에서 해가 떠서, 저녁에 속리산으로 해가 진다.  

 산골 계곡 속 좁은 땅이다보니, 역사에 남은 위인을 배출한 바도 없고, 역사의 한 장면을 차지한 일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다. 마을회관에서부터 뒤로 널찍이 마을이 퍼져있다. 거의 모든 집이 슬레이트 지붕이고, 집마다 농기구를 두는 창고를 끼고 두 채, 혹은 세 채로 되어 있다. 그래도 보통 양옥 구조라, 화장실이 집 안에 있어 악천후에 비맞고 화장실 갈 일은 없다. 담벼락은 높지 않다. 없는 집도 많다. 동네 안쪽까지 시멘트, 혹은 아스팔트로 도로가 놓여있고, 수도와 전기도 잘 들어온다. 도시 못지 않다. 다만 큰 도로를 빼면, 다른 도로에는 차선이나 노면 표시는 없다. 농번기에는 도로도 온통 흙탕 범벅이 되지만, 배수로가 도로 옆에 나란히 달리고 있어서 비만 오면 다시 길이 말끔해진다. 이 길을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오토바이를 몰고 지난다. 학교가 멀기 때문에 어른들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이젠 길이 놓였지만 예전엔 칠봉산을 넘어야 학교를 갈 수 있었다. 농사가 바쁠 때면 어른들에게 잡혀 농사일을 돕기도 하지만, 그래도 학교 일과시간은 보장받는다. 자기들 어릴 땐 학교고 뭐고 모내기 도왔다는 양념이 붙기는 하지만. 동네에 에쿠스며 그랜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보다는 트럭이 많고, 트럭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은 것은 그래서이다. 오히려 흙길을 밟기 힘들다. 논밭은 죄다 흙이지만, 길은 당연하다는 듯 시멘트다. 그래서 오래 걸으면 발이 아프고 관절이 시큰 거리기 마련이다. 시골마을이 노냥 그렇듯 마을 안에도 오르막이 있는데, 그 끝에 사는 아저씨네에 들르기라도 하면 내려오는 길엔 무릎이 뜨끈해진다. 

 이 곳 사람들은 거의 다 농사를 짓는다. 농작물은 다양하다. 옛날엔 논농사도 꽤 지었다고 하지만, 땅이 좁고 강이 멀어 원래 논농사에 맞지 않았다. 이제는 밭농사가 주력이다. 한때 전국에 1백여개소 밖에 없었을 시절부터 지어오던 오랜 고사리 밭이 이 마을에 있고, 주변에 복숭아며, 감을 재배하는 과수원도 곳곳에 퍼져있다. 오이며, 호박같은 채소도 조금씩은 어느 집에선가는 부쳐먹고 있다. 덕분에 마을 주민들이 잔치라도 벌일 때면 채소가 모자랄 일은 없다. 땅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필요하면 씨라도 뿌리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여년 사이의 큰 변화라면 역시 마을 주민이 줄어드는 것이고, 휴경지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휴경지에 가득히 태양열발전판을 깔아두었고, 놀리는 것보다는 쏠쏠하게 돈을 버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평평한 땅에 깔아야 하는지라, 하필 금싸라기같은 마을 옆 땅에 가득히 펼쳐 있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하는 어른들도 제법 있다.  

 예전엔 계절마다 잔칫거리가 있었다. 명절이 있고, 경조사가 있었다. 요즘엔 결혼도 없고, 누가 죽는 일도 적으며, 아기가 적어서 돌이며 백일도 없다. 명절도 이젠 못만나던 가족끼리 모여 보내지, 동리 단위로 보내지 않는다. 잔치를 벌일 일이 없다. 대신 물산이 더 풍부해졌다. 예전 같으면 잔칫날에나 먹었던 전이며 고깃국을 매일 해먹을 수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매일이 잔치지만, 달리 보면 잔치 벌일 일이 없다. 농번기가 끝나고 추수를 마치면 마을이 다 모여서 돼지를 잡기도 했는데, 이젠 비닐하우스 때문에 농한기라고 할 것이 없다. 겨울이 다가오면 마을 사람 마을회관에 모여 배추를 절이고 고추가루를 뿌려 김장을 담궈 나눠가졌는데, 기력이 쇠한 노인이 많아 모이는 이가 적어졌다. 그래도 아직 마을에서 김장을 함께 한다.  

 인터넷 환경이 좋다고는 못할 것이다. 안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에 시골마을 정보화사업으로 인터넷은 깔렸는데, 농한기에 틈틈이 거기 적응하는 사이 어느새 세상은 3G며 LTE 중심으로 넘어가 버렸을 뿐이다. 회선은 깔려있으니 차라리 인터넷은 잘 되는데, 스마트폰은 영 어렵다. 흙 묻은 목장갑 위로 터치가 잘 되지도 않고, 밭마다 과수원마다 기지국을 깔긴 어렵기에 속도도 느리다. 사실 그 정도면 된다. 만나고 대화하는 사람들은 거간이 황령리 사람들이고, 저녁이면 알아서 마을회관에 모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스마트폰으로 연락할 필요가 없다. 급한 일이 있으면 이장이 알아서 방송으로 이야기해준다. 또한, 어른들은 도회지에 나간 친척들과 영상통화를 할 때면 우선 세수를 하고 머리를 매만진 다음에서야 영상을 켜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흙밥먹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은척면에 하나 뿐인 양조장에서 만드는 은척막걸리에 자부심을 느낀다. 어른들이 도회지에 나갈 때 대량으로 사들고 들어오지만, 양조장에서 트럭으로 마을회관마다 배달을 다니기도 한다. 예전엔 아이들이 나가서 사들고 오다가 마시는 일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먼 옛날의 이야기다. 농사를 짓다보면 참을 많이 먹고, 참을 먹을 땐 항상 막걸리를 곁들인다. 첫 참이 오전 10시 경에 있으니, 도시 사람들 기준으로는 아침부터 술을 마시는 셈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름엔 새벽 5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한다. 그리 이르기만 한 시간은 아닌 셈이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같이 참을 먹고, 다 같이 트랙터를 몰고 오토바이를 달린다. 경찰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없지만 오더라도 못본 척 하기 마련이다. 막걸리와 소주를 빼고 나면, 참은 거의 옥수수며 찐감자, 김치에 말아 내는 국수 같은 것이다. 과자나 초콜렛 같은 것은 보기 드물다. 편의점은 커녕 수퍼마켓도 10km는 족히 가야 나오기 때문에, 사오려면 큰 결심을 해야 한다. 다만 이장이 마을회관에 비품으로 과자며 사탕을 사다 두려고 하는 편이다. 나이가 몹시 많이 든 노인분들은 왠지 단 음식을 몹시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특별히 불편함을 모른다. 농민의 삶은 상거래보다는 직접 만들고 직접 해먹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해하는 것은 도시에 있다가 들어간 사람들 뿐이다.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은척면 밖의 다른 시골 마을들에서는 교회가 마을 한 가운데 있어서 중심을 잡아준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마을에서는 소식을 알리고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는 것도 목사 부부가 해줘서, 이장이 훨씬 편하다고도 하던데, 황령리에선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마을 밖에 따로 떨어져 있을 뿐더러, 다니는 이도 많지 않아 중심적인 역할로 보긴 어렵다. 그래도 목사님이 마을에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유일한 사람이다. 마을 사람들이 먼저 찾아가는 일은 많지 않지만, 목사가 마을을 돌다가 이런 저런 분쟁이며, 조언을 주는 일은 종종 있다. 마을 출신 사람은 아니지만, 목사의 말을 사람들은 대체로 수긍하고 듣는 편이다. 삼성전자에 다니다 온 엘리트라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목사님 없는 자리에서 칭찬하는 일도 빈번하다.  

 어린 아이들, 젊은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젊다고 오래 이장을 떠맡아야 했던 마을회관 옆집에 사는 아저씨네에는 20대 딸 셋이 있는데, 이젠 대구며 서울에 나가 살고, 명절에나 얼굴을 들이민다. 복숭아 농사를 짓던 아랫녘 할머니 댁에도 20대 아들이 있는데, 그래도 가까이 살아서인지 주말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가끔 번잡한 도시를 떠나 아이들을 키우러 오고 싶다는, 혹은 아이를 맡기고 싶다는 자녀들이 있기는 하지만, 초등학교조차 9km가 떨어진 이 황령리에 실제로 아이를 상시 둘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20대 아들딸들도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도회지의 친척집에 나가 살며 학교를 오갔다. 아이들은 아주 어리거나, 아니면 중학생 이상은 되는 나이대 밖에 없다. 그래서일지, 마을엔 놀이터가 없다. 예전엔 필요성을 몰랐고 지금은 필요성이 없어서 없다. 집마다 수저며 그릇이 사는 사람보다 몇 벌씩 더 있기 마련인데, 명절엔 자식들 가족을 위해 꺼내진다. 하지만 평소라고 광 속에 넣어두는 것은 아니다. 언제 옆집 사람이 불쑥 찾아와서 밥을 같이 먹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본인들도 무료하면 불쑥 옆집에 가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두끼까지도 하고 오곤 하기 때문에 그걸 불편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다만 잠은 반드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잔다. 이웃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것만은 무례라고 느낀다. 어려서부터 마을에서 쭉 살아온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이걸 편하게 느끼진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들도 친구의 집에 찾아가 똑같이 행동한다. 

 외국인은 많지 않다. TV며 다른 지역 농민들 이야기를 들으면 온통 시집 온 외국인들이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시골 마을을 가득 채우고 사는 것 같은데, 황령리에는 외국인이 없다. 은척면을 다 뒤져봐도 14명이 고작이고, 그들이 낳은 자식도 11명이 전부다. 20개 리에 단 14명이면 많다고 할 일은 아니라고들 생각한다. 어떤 어른들은 외국인이 없어서 좋다고도 하지만, 외국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들도 많이 있다. 아무튼 1,508명이 살고 있는 지역이니까.   

 아프면 정말로 큰일이다. 그나마 한의원은 10km 안에 하나 있지만 병원은 26km를 달려야 비로소 하나 나오기 때문이다. 옛날엔 8km 떨어진 면사무소 근처에도 작은 병원이 하나 있었는데, 원장이 은퇴한 뒤로는 다시 병원이 생기질 못하고 있다. 보건소는 그래도 10km 안에 두 개나 있어서, 어디 아이가 넘어졌거나, 농사짓다 쟁기에라도 찔리거나 하면 마을 사람들은 보건소 신세를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건소며 병원의 의사는 어지간한 병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항상 간단한 항생제와 진통제만 처방하고 만다. 마을 사람들도 큰 병이 걸린 것 같으면, 차라리 멀리 도회지로 나가서 진료를 받는다. 거리로는 대전이 가깝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대구에 더 친근함을 느끼는 것 같다. 큰 병이 났을 때 주로 찾아가는 병원도 대구의 대학병원들이기 때문이다. 

 의사보다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이 공무원이다. 은척면 전체에 15명의 공무원만 있고 그나마 한명은 면장이고, 다른 하나는 출장소로 따로 떨어져나가 있다. 외국 출신 신부보다 공무원이 적다. 사실, 농가의 사람들은 공무원을 찾을 일이 없다. 담벼락도 자기들이 세우고, 하천도 자기들끼리 청소한다. 등본 같은 걸 뗄 일도 별로 없다. 검사며 판사같은 높은 사람들은 더더욱이나 만날 일이 없다. 경찰서는 커녕 순경 서너명이 근무하는 파출소도 10km 밖에 있다. 국회의원이나 상주시장 선거를 해도 후보들은 황령리를 스쳐지나갈 뿐, 차에서 내려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 일이 없다. 농민들 특유의 자생적 근성이 합쳐져서, 공무원들을 매우 멀게 느낀다.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일은 없지만 설화는 있다. 유래가 깊은 동네마다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있기 마련이다. 은척면은 예로부터 은척을 숨긴 땅이라고 알려져있다. 원래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은척과 금척, 두 가지 보물이 신라땅에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는 상주, 다른 하나는 경주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구가 너무 많이 늘었고 나랏님이 견디다못해 땅에 묻으라 했는데 그래서 상주시 은척면, 경주시 금척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과연 조선시대에는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하다 하여 한때 경상감영을 경주에 두었다가, 다시 상주에 두어서, 그래서 경-상이라고 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 시절엔 은척면 황령리에도 곳곳까지 사람이 가득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일단 황령리 사람들은 그 은척이 묻힌 곳을 칠봉산 바로 앞 은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산 이름이 그럴 리가 있냐는 것이다.  

 경북 상주시 은척면은 한국의 읍면동 중 소멸위험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고령인구를 분모로, 2, 30대 여성을 분자로 두고 산출한 "지방소멸위험지수"가 0.2 미만이면 소멸고위험군에 속하는데, 은척면은 그 수치가 0.03으로 한국 최저치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이러하다.  

 2020년 의사 집단행동 사건 전후로 인터넷에 시골에 의사를 더 보내야 한다는 당위적 이야기가 많이 도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시골에서의 삶의 모습을 잘 아는 것 같진 않았다. 나도 모른다. 나도 인생의 87%를 동 지역에서 살았다. (군생활도 시골에 포함하면 도시생활 비율은 82%다)  

 흔히 지식인 집단으로 꼽히는 직업군에 속한 이들일 수록 도시에 사는 비율이 높은 듯 하다. 판검사며, 교사며, 고시 출신 공무원이며, 대학연구자, 언론사 기자, 대기업집단의 정규직 사원 등은 시골에 살 일이 없거나, 살게 되더라도 일시적이다. 그런데 일단 확인 가능한 통계에서, 의사는 예외이다. 의사는 약 4%가 읍이나 면지역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산다. 자세한 통계는 없지만, 읍면에서 활동하게된 의사들이 다시 대도시로 나와서 사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의사들은 의대 동기며 선후배들과의 연락망이 갖춰져있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시골의 삶에 대해 의사들은 제법 많은 정보를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의사들이 지방에 가서 안쓰럽다거나, 하는 말을 하는게 아니다. 의사들이 어쩌면 현대 한국에서 시골의 삶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지식인 집단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에 아래 링크의 글을 보았는데, 난 굉장히 호소력있다고 생각해서 의사 지인들에게 왜 의협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를 물어보았다. 반응은 제법 의외였는데, 이미 여러번했고, 당연히 아는 이야기이며, 이것이 초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사들에겐 이 정도 정보는 common sense에 가깝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이런 정도의 이야기로 국가 정책 방향이 바뀔 것은 아닐 것이고, 민의가 변할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일반 대중들이 이런 걸 잘 아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역시, 모르는 종류의 이야기 - 예컨대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쉽게 강한 이야기를 하는 건 좀 더 자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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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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