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카테고리 없음 2014. 6. 9. 10:12
창문이 여전히 어스름한 걸로 보아 햇살에 깬 것은 아닌 모양이고 잠을 너무 많이 잔 탓에 스스로 깬 것 같았다. 시계는 아직 5:45였고 연휴 첫날 160km 어치 탔던 자전거 때문에 뭉친 종아리의 근육통이 아직 조금 남은 듯했다. 조금 더 잘까 잠시 누워서 고민했는데 전날 밤에 오고간 카톡의 마지막 푸쉬가 눈에 띄었다. 더 자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대충 일어나 털고 앉아 바닥을 보았더니 연휴 동안 여행이니 여독이니 해서 청소를 안한 탓에 깔개에 내려앉은 꼬무락지들이 눈에 띄었다. 불을 켜고, 베란다로 나갔다. 창 밖에는 벌써 인부들이 중장비를 들고 와서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매일 새벽에 공사하는 건 진짜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은데, 잠시 5초 정도 민원을 넣어볼까 했다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세탁기 위의 청소기를 들고 방에 들어와 전원을 꽂았다. 며칠전 인터넷에서 듣고 구매한 진공청소기용 이불먼지 제거기를 끼우고 깔개랑 담요의 먼지를 빨아들였다. 일반 마개로 바꿔끼우고 다시 한번 청소기를 돌렸다. 방에 보이는 먼지가 없는 걸 보고 청소기를 다시 원 위치에 두었다. 6:05. 일찍 출근할까 하다가, 종아리와 허벅지 탓에 운동하기도 마뜩찮고 하여 TV를 켰다. 잠시 이라크 같은 느낌의 뉴스 - 일종의 테러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뉴스에 비춰지는 세계의 잔혹성과 상관없이, 하품이 나왔다. PS3의 전원을 켜고 조이스틱을 찾아 쥔 뒤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어제 하다 끄고 잤던 해적무쌍2를 켰다. 아침이고 하니 기분만 가볍게 풀 생각으로 미호크를 골라 들고 맵에 나갔다. 1시간인가, 어느 정도 머리속을 비우고 칼질을 하다가 문득 배가 고파졌다. 오븐에 어제 만들어 본 비스퀴가 남아있는 게 기억났다. 마스카포네 치즈를 만들 구연산이 없다는 것에 비스퀴를 다 굽고 난 뒤에 비로소 생각이 미쳐서, 어떻게 처리하기 힘들었는데 잘 되었다 싶었다. 한 조각 입에 넣고 씹어먹으면서 이번엔 쿠마로 바꿔들고 맵에 나갔다. 비스퀴가 약간 흐물해진 듯 했다. 두 조각 다 먹어치우고, 접시를 들고 씽크대를 가서 설거지를 했다. 시계를 보니 여전히 7:30. 컴퓨터를 켰다. 어제 검색하던 Full-Carbon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가 검색 히스토리에 있어서 다시 눌렀다. Cello Cayne는 130만원, Bianchi Intenso 급은 시판가가 320만원 정도라는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를 읽었다. 일어나 샤워를 했다. 내 방은 보일러를 켜야만 뜨거운 물이 나오는 탓에, 보일러를 켜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차가운 물로 그대로 씻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면서 다시 TV를 틀었다. 하던 게임을 저장하지 않은 걸 기억해 냈지만 별로 상관없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김동률 노래가 듣고 싶었다.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가 아이폰에 없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니 어제 산책하면서 에일리의 노래가 늘었어도 없던 것이 기억났다. 아이튠즈를 켜고 보관함에 노래들을 찾아보니 역시 없었다. 벅스에서 구매한 노래들을 넣어둔 USB 메모리에서 노래들을 카피해서 하드에 넣었다. 아이튠즈에 갱신시키고 동기화를 시켰다. 추가한 노래들이 아이폰에 들어가질 않았다. 두번 세번을 하는데도 안됐다. 그냥 아이폰에 있는 노래를 모두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동기화를 하기로 했다. 비로소 노래들이 아이폰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시간 계산을 해보니 30분 정도가 걸릴 모양이었다. 옷장을 열어 옷들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아이튠즈가 노래를 카피해 넣는 패러미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게 종료되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지갑과 사원증을 챙기고, 아이폰에 이어폰을 꽂고 일어섰다. 8:25. 에일리 노래를 먼저 틀었다. 집 앞에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BRT가 오는 게 보였다. 서있는 줄을 보니 어차피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얼른 GS25에 들어가서 커피를 하나 사들었다. 사들고 나오면서 보니 이번 건 케냐AA이었다. 커피 뚜껑을 따서 마시면서 BRT에 올라탔다. 역시나 자리는 이미 다 차있었다. 버스 문 앞에 기대어 서서 휴대폰을 들었다. 누군가에겐가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주말 동안 있었던 비루한 내 이야기를 친한 누나에게 연락해 카톡으로 타이핑해드렸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에 질책도 하고 우스갯 소리도 오가면서 어느새 세종 근처까지 왔다. 문득 내 삶 하나하나가 기적으로 가득차있다는 피할 수 없으리만큼 강한 확신이 들었다. 종교를 가지려고 15년 가까이 노력해보았고 몇번이고 확신을 느끼고서 교회며 성당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 오지 않던 때가 이번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 일요일에 가보기로 했다. 사무실에 오니 동기 하나가 일요일 숙직을 대신 해달라고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아마 이번주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런 기적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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