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우리가 안온함을 느끼는 반석이 얼마나 얇은 껍질인지를 잊는다. 


 후한은 기원후 25년에 개국한 나라로서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뒤를 이은 국가다. 한번 망했음에도 15년이 지나 다시 건국되었고, 그 상태에서 200여년을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후한 말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후한은 그냥 원래 있는 나라, 그냥 당연한 것, 당연히 정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후한은 처음 광무제가 국가를 세웠을 때부터 황제권한이 약해 연립정권을 세워야 했던 국가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황제는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였던 국가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황제는 두 가지로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했는데 하나는 주자사(광역자치단체장)보다는 그 아래 태수(기초자치단체장)의 권한을 높여줌으로써 중앙에 대적가능한 지방의 힘을 깎으려고 했고, 둘째로 신권과 대립하는 자들로서 내시들, 그러니까 환관들의 권한을 세움으로써 대립하려고 했다. 후자가 특히 문제가 되었다. 


 환관을 정치적 세력으로 활용하려고 한 왕조는 한 둘이 아니다. 환관은 대를 이을 수가 없고, 친족 관계가 상실되며, 무엇보다 남자들에게서 존경을 받기 어려운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황제/왕의 관점에서 자신과 경쟁하지 않는 세력으로서 믿을만 하다. 비잔틴제국의 역사에 남은 자들 중에서도 환관들이 있고(나르세스) 당장 한국의 중세/고대사에도 이름이 남은 환관들이 다수 있다. 이들을 활용하려고 한 것 자체는 가능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황제와 황궁을 관리하고 운용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처음 그들을 기용한 황제는 이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겠지만, 그 이후의 황제들도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것. 후한에서 일어난 일이 이런 것이었다. 


 강대한 외척인 양기가 순제가 황제이던 시기부터 대장군으로 재임하면서 국정을 그야말로 농단했는데, 자신의 가족에서 제후나 대장군을 십여명을 낼 정도로 부패했다. 어린 황제인 충제를 즉위시켜 더욱 권력을 휘두르던 양기를 물리친 것은 바로 그 다음 황제인 환제. 환제는 환관 조등(조조의 조부인 바로 그 환관)의 도움으로 취임했고, 조등의 부하들인 환관들을 이용해 양기를 탄핵했고, 자연스럽게 환관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 시절 환관과 환관위 주변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탁류파. 반대로 이들과 다르게 유학자로서 탁류파를 논박하던 이들을 청류파라고 불렀다. 환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환제 자신과,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환관인 조등이 이들을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영제가 취임하면서부터는 문제가 점점 더 커져갔다. 이 시대의 신흥 환관인, 삼국지의 맨 초입부를 장식하는 십상시가 바로 이 시대에 나타난다. 십상시는 스스로를 열후로 봉할 정도로 국정을 다시 농단하기 시작했고, 청류파들은 이들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하고 대항하고 나선 것. 


 이 청류파가 이름은 맑을 청을 쓰고 있지만 꼭 반드시 청렴결백하고 의기에 차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대지주였거나 누대의 귀족이었고, 이들도 단지 황통과 신권을 사이에 끼어들어 부패를 벌이는 환관들에게 문제 제기한 것에 가깝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농단하던 탁류파에 비해서는 확실히 맑았다고 할 것이, 어쨌든 권력형 부패 자체는 적거나 안 저지르기는 했으니까. 이 시대에 탁류파로 아마 꼽혔을 대표적인 가문 출신인 원소는 6년상을 탈상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청류파의 대표주자인 것처럼 자리 매김했고, 자신의 나이나 지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입지를 갖게 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는 십상시와 대장군 하진이었다. 십상시는 황제의 바로 옆에서 황명의 출납을 관장했고 신하들이 황제와 만나는 일정과 내용을 조정할 수 있었다. 이들은 서원팔교위라는 제도를 설립하여 십상시 아래 환관인 건석을 수장으로 임명했는데, 서원팔교위는 중앙군을 총괄하는 8명의 교위를 뜻했다. 이들이 중앙군을 총괄했고, 중앙군의 모든 조직은 원칙적으로 이 아래에 해당한다. 전군을 총괄하는 대장군부도 여기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장군은 대장군이고, 전군을 총괄하는 지위는 어쨌거나 의미가 큰 지위였다. 중국 역사에서 대부분 대장군은 승상과 동급이거나, 혹은 승상 아래 3공에 해당하는 지위에 해당했는데 후한시대의 대장군 역시 3공과 같은 지위로 간주되곤 했다. 이 대장군 하진은 자신의 여동생이 황후가 되어서 십상시에 의해 출세한 자이지만, 그것만으로 출세했다고 보기는 힘들 정도로 나름 정치적 감각을 갖고 있던 자였다고 할 것이다. 하진은 황건적의 난을 거치면서 실효적인 권한을 갖게 되었고 특히 청류파들에게도 인망을 얻게 되었다. 원소가 하진에게 접근한 것이 이 시점이었다. 권한과 지위는 있으나 인재풀이 부족하던 하진은 원소의 접근 하나로 순식간에 많은 참모진을 얻게 되었고, 이들은 하진을 이용해서 십상시를 척결하려고 했다. 


 하진이 십상시랑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된 것은 영제의 사망 이후 있었던 황제 옹립 과정이었다. 십상시의 아래였던 내관이며 서원팔교위의 장인 건석이 새로운 황제로 유협을 옹립하기 위해 문제가 될 대장군 하진을 암살하려고 한 것. 그러나 하진은 우연과 행운이 겹쳐 이 암살에서 벗어났고, 결국 새 황제는 하진의 여동생이 낳은 유변이 황제가 되었다. 이후에 건석은 자신의 암살 시도를 하진이 아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는 공포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금군을 들어서 반란을 일으켜 황제를 바꾸고 하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십상시들은 하진에게 도리어 건석의 쿠데타 정보를 알려줬고, 건석은 처형당한다. 


 원소가 보기에 환관들은 정말 큰 문제였다. 황제가 바른 정치를 해서 사람들이 잘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기본이고 정의라고 한다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는 환관들은 그 자체로도 부정의이지만 이들의 부패로 인해 정치체제 자체가 흔들리고 당고의 금과 같은 사건들을 거치면서 사대부들이 국가체제에서 이탈하는 것은 더욱 문제였다. 애초에 환관들이 권한을 갖고 있는 이상 황명을 환관들이 계속 내놓을테니, 환관 체제 자체를 흔들지 않으면 아마도 대신들이 제대로 역할할 수 없는 상황이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원소는 이 문제를 후한 국체 자체를 흔들 문제로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원소가 강경책들을 쏟아낸 것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원소는 십상시들을 척결하기 위해 하진이 직접 주살할 것을 원했고, 중앙군을 동원해서 십상시의 권력기반을 비롯해서 주요 환관들을 모두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하진의 권력기반이 곧 청류파와 십상시라는 두 축에 의해 갖춰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십상시를 들어서 칠 권력이 바로 중앙군이라는 점이 문제였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하진이 십상시를 물리적으로 척결한다면 당연히 다음 차례는 하진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십상시가 있다면 청류파는 십상시를 공격하고 하진을 공경할 것이지만 십상시가 사라진다면 자신의 기반은 청류파 뿐이고, 그때가 되면 청류파는 아마도 기반이 부정한(성장 기반은 차치하고 보더라도 하진은 외척이다) 하진을 공격할 것이 뻔했다. 애초에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십상시를 척결할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였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대장군부가 실제로 동원 가능한 전력은 중앙군이고, 중앙군은 십상시가 통괄한다. 과연 중앙군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이 십상시에게 정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있다고 해도 십상시의 혜택을 봐온 중앙군이 자신의 뒤를 따라 십상시를 척결할 수 있을까? 이런 점들이 문제였던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원소가 여기서 제시한 대안은 십상시를 자발적으로 물러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태후와 십상시에게 강력한 압박을 주기 위해서 지방의 태수들이 거느린 군대를 수도 인근으로 불러올리고 그 군세로 압박하자는 것. 하진은 여기 따랐다. 그래서 서량의 엄청난 변방에서나 오가던 동탁과 그의 군대가 낙양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여포를 거느린 정원의 군세가 낙양에 온 것도 이때였다. 정원이 부임해있던 병주는 여기서 먼 지역이지만, 이때 합법적으로 낙양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하진이 이 대안을 지지한 것은 나름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앙군은 하진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쿠데타에 응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다른 문제였다. 특히 중앙군은 십상시의 사병화도 진행되어 있던 상태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방군은 낙양에서는 오직 하진 한 명이 총괄하는 군대였고, 따라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해서 황궁을 압박하고 정치적 작업을 병행한다면 큰 무리없이 대권을 잡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연히 이 계책은 이미 그 당시에도 굉장히 위험한 행위라는 의견이 많았다. 지방의 치안이나 국방은 물론이거니와 애초에 지방관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에 영향을 끼치는 관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소는 계책을 강행했고 하진은 이를 받아들였다. 모택동처럼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는 기본적인 권력 문제만 생각할 수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중앙군으로 지방군은 컨트롤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들은 이미 평화와 안정이 유지된 경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착각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런 류의 안정 - 시민/문관에 의한 군부에 대한 지배는 역사적으로 종종 빠르고도 간단하게 깨지곤 한다. 


 후대의 우리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지만 이 계책은 굉장히 문제가 된 계책이었다. 단순히 부정부패가 있고 바르지 않은 정치가 오가던 후한은 동탁의 학정과 군벌의 종횡, 학살, 기아, 전쟁, 이민족의 침략을 거쳐서 약 400년의 혼란기를 겪는다. 단순히 삼국시대만 친다고 하더라도 60여년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인구의 50~80%가 유실된다. 원소가 생각하던 국가 체제의 문제는 기실은 정권의 문제였고, 그 계책으로 인해 나타난 건 중앙정부의 지방관에 대한 통제 불가능성, 그로 인한 군벌의 종횡과 전쟁이었고 그래서 잃은 것은 국체였다. 지방관들이 군대를 이끌고 상경했으나 하진 자신이 십상시에게 살해당했고, 그 혼란 와중에 하진의 부관으로서 권한을 대행한 원소가 십상시 척결에 신경쓰느라 상경한 지방군들에 관심을 놓친 사이에 동탁군이 낙양성을 치고 들어와 중앙군을 흡수하고 삼국지 초반의 그 20만의 대군세를 형성한다. 


 정권을 잡은 동탁의 패착은 문제를 더욱 키웠다. 그는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는데, 동탁이 군사력으로 수도를 장악했지만 명예도 권위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과 같은 강력한 지방관은 없지만 지방관들은 나름대로 강력한 입지를 갖고 있었고, 이들은 청류파로서 권위나 학식도 갖춘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하진을 도와 십상시를 몰아내고자 한 것은 바로 청류로서 보황을 위한 것이었는데, 보황의 반대로 극을 달리는 인물이 들어서서 황제를 마음대로 퇴임시키니 이것은 왕망의 재림에 다름없어 보였을 것이다. 이때 이들 지방관들은 한나라의 지방관료이자 군사령관들로서의 직함과 책임감과 명분을 그대로 갖춘 채로 중앙정부에 대립하는 군대를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18로 관동군이다. 이 시점에서 낙양의 지방에 대한 권위는 끝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동탁이 황제를 끼고 돌았으면 이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시점에서 관동군이 원소를 맹주로 세운 건 그가 청렴하고 강직하며 부패한 정권에 오래도록 대항한 자라는 점, 그러면서 능력있고 강력한 가문의 힘을 업고 있다는 점이 작용한 것일 것이다. 원소는 군을 일으켰기도 하거니와 당연히 낙양의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는 없었는데, 그를 대신할 환제의 직계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원소는 그래서 황족으로서 전 황제와 가까운 친척이고, 나이도 있고, 능력도 있으며, 명망이 높았던 유우를 황제로 새로 세우려고 한 것이었다. 유우는 정통성도 높았고 이 정도로 전국적인 반발이 있는 상황에서 실제로 황제가 되었다면 관동군 전체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후한은 아마 상당 기간 더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우는 글자 그대로 인망 때문에 이 추대를 거절했다. 유우는 아마도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고 자신이 나서는 건 겸양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것 같고, 그 선택이 한나라 자체(정체)를 넘어서 한나라가 가져다준 여러가지 혜택 - 내일 죽지 않을 기대감, 일을 하면 먹고 살 수 있다는 믿음, 백성과 정부가 있다는 생각 - 의 기본적인 값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결국 그는 겸양했고, 관동군은 결집되지 못하고 정통성 면에서 반군으로서만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었다. 공손찬이 후에 유우와 싸울 때까지도 여전히 원소에게는 유우라는 패가 한나라 체제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패로 있었을 것 같아 보이는데 그는 끝내 다시 이 패를 꺼내지는 않았다. 실패한 패로 생각한 모양. 




< 연습문제 > 


(1) 황제가 환관을 이용해 신권을 제압하는 건 그 시점에서는 좋은 선택일 수는 있겠지만 후대의 황제에게는 또 다른 감당할 수 없는 대립세력을 만드는 꼴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환제는 황권이나 권력갈등관계가 다음 황제 대에서도 큰 문제일 지언정 체제 자체를 흔들어버리는 문제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십상시는 십상시 외부에서 십상시를 단일한 집단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 같다. 그들은 "십상시의 난"을 실제로 일으킨 건석이 십상시가 아닐 뿐더러, 건석을 십상시 손으로 처리했으니 문제가 해결되었고 다시 하진과 밀월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3) 원소는 지방군을 불러올렸는데, 그들이 벌일 수 있는 최악의 상황 - 국체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통제가능하지 못한 패는, 그 패가 벌일 수 있는 문제점의 범위까지 고려한 뒤에서 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안정된 체제는 그러나 종종 사람들의 눈을 흐린다. 특히 군이나 무력은 더욱 그렇다. 평화가 길어지면 무력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사라지는 것 같아 보인다. 도리어, 그 본질에 상응하는 방책들이 대책인 것처럼 횡행하기도 한다. 


(4) 동탁은 진실로 어리석었다. 그가 한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피로 피를 씻는 개혁을 벌이는 자로 비춰지는 현대의 창작물들이 조금 있는데, 전혀 그렇게 볼 일이 아니라고 할 것이 그는 대체로 "황실을 타고 앉아 권력을 뿌렸으면서" 동시에 "황실의 권위를 깎아내는 일들을 방책이랍시고 활용해댔"다. 황제를 멋대로 폐위하고 올린 점, 수도를 단순한 전술적 유불리만으로 태워버리고 옮긴 점, 자신의 지위를 자신 스스로 부여하여 황제의 권위를 깎은 점은 권위에서 곧 충성이 나오는 왕권체계에 대한 이해가 없던 것으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패배하고 죽은 것도 그런 측면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5) 유우는 한나라가 선사한 혜택이 단순히 황권이나 정부 같은 수준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국가나 국체의 안정성이 주는 혜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500미터 이상 이동하는 동안 죽지 않을 수 있고 앞으로 5일 이상 생존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수준에서부터 봐야할 것이다. 아프리카나 남미가 미개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이 시대가 그런 것 아닐까. 우리도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유념하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닐까, 라는 게 생각이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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