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는 `97년말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를 `98년에 매우 크게 받았다. 한국도 피해가 컸다, 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좀 궤가 다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정권이 무너지고 학살극이 벌어졌다. 국가가 파산할 지경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끝모르고 추락하는 경제적 위기는 결국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시민들은 인도네시아 자산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진 중국계 시민들에게 울분을 풀었다. 중국계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다. `98.5월 한달여간 1천여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건 이상의 강간 신고가 있었으며, 수천억원 규모의 재산 손실이 있었다. 수만명의 중국계가 외국으로 탈출했다고 알려져있다. 이 시기 자카르타 전역이 통제에서 벗어났으며, 1967년 취임하여 장기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던 수하르토가 그 여파로 결국 그 5월에 퇴임하게 되었다. 하반기에는 동티모르가 다시 독립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했고 분쟁이 격화되어 이듬해에는 결국 동티모르 학살로 연결되었다.

 

이 인도네시아가 `98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13.1%이다.

 

소련은 세계의 양대 열강으로 약 40여년을 군림하다가 어느 순간 돌연 해체되었다. `91년 8월, 공산당 전통세력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연금되었고, 모스크바에 탱크가 진입한 뉴스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옐친과 시민들이 나섰으며,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 거리를 메우고 바리케이트를 쌓았으며, 쿠데타 정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각 지역도 속속들이 쿠데타정부에 반기를 들었으며, 전세계가 옐친을 지지했다. 쿠데타군은 실각하고 고르바초프는 풀려났으나 이미 주도권은 옐친에게 있었다. `91.12월 말, 결국 소련이 해체되었고 독립국가연방이 수립되었으며, 시장경제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제도 변화는 너무 큰 비용을 가져왔다. 5백만명 수준에 이르던 소련군이 급격히 해체되어 민간으로 돌아와버렸고, 군에 남은 이들도 하루치 밥값에 겨우 닿는 급여만 받을 수 있었다. 평균수명이 10년이 낮아졌으며, 초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땅과 공장의 주인을 총으로 정하는' 경우마저 나타났다. 질병과 사고, 도피성 이민 등으로 수백만에 달하는 인구가 감소했다.

 

이 러시아가 혼란의 중심이던 `92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14.5%이다.

 

중국은 냉전기 초반 빈곤 상태에 있던 국가를 빠르게 산업화하길 원했다. 청나라 시절의 강성함을 되찾고 싶었음이고, 실제로 지배이론이었던 맑스-레닌주의적 이념에서는 사회주의 체제국가에서 빠른 산업화가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냉전의 상대진영 중 2위의 경제대국이던 영국을 7년만에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했고, 당시 지도자였던 모택동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업 대증산 계획 정책을 마련해 추진했다. 훗날 대약진 운동이라 불리는 정책이었다. 참새를 모두 잡아댔고, 각지의 농촌 마을에 작은 용광로를 마련하게 했으며, 자영농과 부농의 토지를 취합해 농업을 집단화했다. 그 과정은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4천만명 이상이 굶고 병들어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실상 중국의 지방이 보유한 산업역량이 모두 비효율적인 용광로로 변모되었다.

 

이 대약진 운동의 결과로 1962년 당시 중국이 경험한 GDP 상승율이 -16.2%이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위에 떠 있는 나라" 중 하나라고 불릴 정도로 산유량이 많았고, 그 원유 수출을 기반으로 정부재정을 편성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산유국이 마찬가지니 특이할 바가 없는데, 균형재정이 달성 가능한 기준유가를 121달러로 맞췄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2014년 국제유가는 연초 110달러 수준에서 50달러 수준으로 급락했고, 이후에도 계속 하락했다. 게다가 이 유가하락은 셰일가스 개발 성공에 따른 것으로, 항구적일 것이라는 예측들이 나왔다.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이미 `14년부터 물가와 환율이 급격히 망가졌고, 마트와 백화점에 상품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한국인들의 뇌리에 남은 기억도 이때의 뉴스들일 것인데, 급기야는 물가상승율이 400~500% 수준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다. 2019년에는 정치위기도 같이 번지게 되었다. 대립대통령이 취임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전세계가 두 대통령 중 하나를 지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무장병력이 상대 세력의 요인들을 테러하거나 암살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내전가능성마저 점쳐졌다.

 

이 `14년부터 `20년까지 베네수엘라가 경험한 최악의 GDP 상승율이 -24.4%이다.

 

시리아는 중동의 봄 끄트머리였던 `11년 3월 시작한 내전에 아직까지 시달리고 있다. `12년과 `13년 가장 격렬하게 내전이 있었으며, 수도 다마스쿠스를 포함한 전 지역이 반군세력과 정부군의 힘겨루기에 휘말렸다. 약 20~30만명이 내전에 병력으로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300만명 이상이 해외로 나가 난민이 되었으며, 국내 난민을 포함하면 약 1천만명의 시리아 국민이 난민으로 전락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내전 발생 전 2,200만명이 살고 있던 나라였다. 시리아 정부는 서구와 아랍에 의한 경제 제재로 인해 수출입이 막혀 군대에 월급조차 주지 못하고 있고, `13년부터는 '군대가 군 자금을 지역에서 징발'하는 것을 허용했었을 정도로 전근대적 모습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 시리아가 `12년과 `13년 경험한 GDP 상승율이 -26.3%이다.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였다는 의심을 받고, 9.11. 테러로 민감해져있었던 미국에 의해 공격받아 국가가 무너졌다. 2003년의 일이다. 30여만명의 다국적군이 투입되어 2주만에 수도가 함락되었고, 약 1만5천명의 이라크인이 사망했다. 이후 바트당 잔당을 직장과 사회에서 쫓아내는 조치 등이 이어졌고, 이라크는 혼란에 빠져들어 이후 내전으로 연결되었다. 기간시설은 모두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곳곳에서 종파분쟁과 테러와 분란이 일어나 수천 단위의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어떤 추정에는 3년만에 20만명이 죽었다고도 했다.

 

이 이라크가 `03년 당시 경험한 GDP 상승율이 -33.1%이다.

 

금년 2분기 코로나19를 경험한 미국의 GDP 성장율은 -31.7%이다. 일본은 -27.8%이고, 영국은 -20.4%이며, 독일은 -9.7%이다. 아울러 이 수치는 이들 선진국이 2차대전 이후 경험한 최저치이며, 그 이전엔 비슷한 수치조차 경험한 바가 없었다. 추정에는 미국이 1929년 대공황기 경험한 GDP 성장율도 -12.9%라고도 한다.

 

위 내용은 엄밀한 비교는 아니다. 명목과 실질값을 엄밀히 나눠 본 것도 아니고, 연간과 분기의 차이도 있다. 수치를 보고한 것이 독재정부 당국인 경우가 많아, 조작된 수치일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의 GDP 성장율에 대해 한 추정을 할 수 있도록 정리해 올린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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