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온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고 어떤 이는 자신을 비하한다. 우리는 하나 뿐인, 확장 불가능한 우리 몸과 우리 자아를 지나치게 학대하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왜 자신을 비하하는가. 우리는 어떤 때에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나"라는 개인이 나와 완전히 같은 사고 패턴과 취향, '내가 이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면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느껴지는 풍취의 이성과 마주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우리는 자신과 닮은 이에 안도하고 닮은 점들은 신뢰를 부여할 근거처럼 느껴질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전제에서 출발했듯이 바깥을 향하는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나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사랑이다. 클라인씨의
병처럼 사랑은 끊임없이 그녀를 향해 그리고 나를 향해 돌아온다. 그때의 "나"는, 맙소사,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깨닫지 못했다면 그런 사랑도 의미가 있겠으나 깨달은 뒤에는 의미가 없다. 사랑은 서로 다른 인격체간의 대립과 다툼이 동일 공간 내에서 지속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그러나 완벽한 이상형, 나 자신과의 연애는 그런 공간을 창출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몹시도 자신이 싫어질 수도 있음을 알고, 그 만남은 그때 그 순간 깨어질 것이다.

자기애와 자기비하는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를 향하는 사랑과 타자로부터 외삽되는 사랑을 느낄 때 책임을 느끼고 자아의 껍질 밖의 세상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자아 내에 갇혀있는 모습으로는 세계에 포함될 수 없고 우리는 이런 "나"를 유아병적이라 부른다. 이런 나의 자기애는 그리고 필연적으로 자기비하적이다.

왜 그럴까. 무인도에 갇힌 내가 아닌 나는 자폐의 늪에 빠져있지 않은 이상 성숙해가고 타인의 안에 자신을 반영시킴으로서 더 크게 자신을 확장하는 ㅡ 자아의 깊이와 면적을 서로에게 넓히는 이들을 비리본다. 소아병적 "나"는 그런 그들을 질투한다. 그러나 자아의 껍질 내에서 그 안의 "나"의 순수성을 사랑하는 자부심은 내가 그들같은 길을 걷도록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바라는 내 모습이 있지만 내가 부족한 부분들 ㅡ 그 부분이 소아들의 자기비하의 초점이 된다.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모든 경우 그래서 그들은 자기를 비하한다. 비하는 그러나 타인을 향해있는 대화 중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자기 비하는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과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이다. "나"는 비하하고 있는 그 순간에조차 완전히 타인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밀도 높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기에 자기비하하는 이의 자기비하는 역설적으로 가장 강고한 자기애라는 것은 그것이 자신이 가진 이해못할 부족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하하는 이들에게 자기비하를 멈추라고 조언하는 것은 따라서 그들의 자아를 소아병이라는 늪에서 구해내는 일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을 감동시킬 때에만 자기애를 드러낼 수 있다. 그들이 외따로 떨어진 삶을 지향하더라도 실제 그런 삶을 현실에서 직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과 온전히 다른 누군가의 존재에 자신을 투사하고 투사되는 기쁨을 경험하는 것 뿐이다. 그들이 자신에게 감동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자기비하는 끝없이 자아를 자해할 것이다. 그러나 감동할 가장 쉬운 길은 외삽임을 그들은 경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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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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