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시리아 사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시리아는 자신이 중동 유일의 민주국가라고 주장한 적도 없고, 서구적 가치를 따르는 신봉자라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시리아는 자기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군대’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서구 미디어는 독재자 알아사드를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평화의 사도’로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자칭타칭으로 ‘민주주의 본보기’라고 불리는 이스라엘이 시리아 정권과 비교가 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겉으로 보기에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하지만 자기 국민도 아닌 다른 민족을 지배하며, 소요가 생기자 매일같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압제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를 민주주의 정부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왜 시리아는 놔두고 이스라엘만 욕하냐구요?" , 파스칼 보니파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http://newspeppermint.com/2014/08/03/syria_israel/)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겉으로 보기에 민주주의국가" 인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제한이 없는 투표권이 주어진 보통선거제도를 책정하고 있고, 투표가 비밀로 이뤄지며, 연령이나 재산 등에 따른 투표권 차등이 없고, 투표권자 자신에 의해서 투표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 선거 제도의 기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실효적으로 정권이나 의석의 변화가 있어야 하며, 선거의 결과에 정당 및 국민이 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투표에서 지면 내전이 벌어진다거나, 국가가 분리되어 버린다거나 하는 경우는 기본적으로 대의제에 의한 민주주의가 구동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선거가 사실상 이뤄지지 않고 있거나, 직접 선거가 아니거나, 비밀선거가 아닌 모든 제도들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걸 하고 있고, 다른 중동 국가들 중에는 이걸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이 좋은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이냐, 나쁜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이냐는 생각해볼만한 이슈지만 최소한 이스라엘이 민주주의 정부가 아니라는 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예컨대 우리가 관행적으로 연쇄살인마, 강간범을 "인간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나쁜 인간"이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또한 성자에게 대해 우리는 "그는 인간을 초월했다"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한 인간"인 것이지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옳고 바르고 깔끔하고 예쁘고 좋고 완벽한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한 도구이고, 그렇기 때문에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저 소장식으로 생각할 때 그걸 놓치기 쉽다. 

Posted by Chloey
,

 가톨릭 개념 중 사효적 효력과 인효적 효력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두가지 서로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데 오늘날엔 주로 후자의 의미로만 쓰인다. 첫번째 의미는 세례나 혼인성사와 같은 각종 성사의 의미는 그 절차와 예식의 형식이 성경 자체와, 성경에 대한 교황청의 해석에 걸맞게 이뤄졌는지에 따른 것이며 성사를 집전한 사람이 누군지와는 상관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사효적 효력이 우선하며 인효적 효력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약하다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는 여전히 성사의 효력은 절차와 예식 규범에 맞았는지에 따르지만, 그 효력의 강약을 결정하는 건 성사에 참여한 성도 자신의 마음 가짐에 달렸다는 의미이다. 신앙적으로는 후자가 중요하겠지만 신학적으로는 전자가 중요하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등 다신교 체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효적 효력을 강조하는 논리에서는 살인범이 절차에 맞게 집전했다면 그 성사는 인정되고, 성인으로 시복된 사람이 성사를 집전한다 하더라도 절차가 틀렸다면 그 성사는 효력이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복된 사람이 제대로 집전하지 못할 리는 별로 없지만) 이것은 신이 인간과 애초에 "격이 다른" 존재이고, 성경은 바로 그 신이 내려준 것이라는 의미에서 유추된 것이다. 인간 중 가장 사랑 받을 이라 하더라도 신과 비견될 수는 없기 때문에, 신 자신이 지정한 예식의 방법과 절차가 집전자 개인의 능력이나 인격보다 훨씬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성당의 예식은 신도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는 오늘날에도 엄청나게 형식에 집중*1하고, 어느 성당에 가더라도 크게 차이 없는 방식으로 미사를 집전한다. 


 종교에서와 다르게, 현대 공화주의/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또한 좀 다르게 형식을 중요하게 본다. 여기서의 형식은 곧 헌법-법률-시행령-해석의 연쇄로 이뤄진 행정체제를 말한다. 헌법은 어쨌든 일정 시점의 국민적 합의로 형성된 것이라고 전제하고, 법률은 그에 따라 국민들이 정한 대표자들이 결정하도록 하며, 거기에 따라서 헌법과 법률에 예정된 범위 내에서 행정부가 해석해둔 시행령과 규범들에 따라서 현장에서 집행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행정에서의 형식주의이다. 예를들어 진정한 실질로 보면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에겐 엄청난 재산이 은닉되어 있을 것이 세무 공무원 경험과 직감에 번연히 보인다고 해도, 법률에서 규정한 대상재산과 방법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 형식주의이다. 


 형식주의가 중요한 것은 법률이나, 심지어 행정 집행이란 권리침해가 심각할 수 있는데 반해서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급부행정이라고 해도 수십만명 이상이 대상이 되는 사례가 빈번하고, 심지어 규제행정이라고 하면 통상 전국민, 전기업, 전 근로자 등등이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여기에 일률적으로 적용할 기준이 있어야 하기 마련이다. "내일부터 해가 뜰 시간을 좀 당겨야 한다", "내일부터 회계준칙에 사용될 연산 방법은 1+1=7로 하자" 같은 이슈라면 그래도 자연법칙이나 산수 등을 이용해서 쉽게 기준을 정할 수 있는데(정한다기 보다 그냥 법칙이나 산수를 따르면 되는데) "내일부터 관공서 업무 개시시간을 한시간 당기자" "내일부터 회계 준칙에 사용될 사칙기호는 ^%$로 하자" 같은 것이 되면 논의의 여지가 아무래도 있을 수 있기 마련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누구나 자기 입장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어떤 근본적인 곳에서 힘을 끌어와야 하고 그것은 당연히 민의여야 하는데, 매 사안마다 민의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효율성 면에서도 문제가 있는데다가, 당연히 합치성에도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동태적확률일반균형 모형에 입각한 국민소득/노동시장 영향성 검토 결과에 입각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반복적 참여 제한 규제 강화  타당성" 같은 것들을 매번 국민투표하기도 옳지 않고 애초에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거나 종사하지 않아본 사람이 낸 의견의 타당성이 어느 정도인지도 생각해 볼 일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법률에서 범위를 정해주고 그 범위 내에서 정부와 연구자들이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재량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정치/정책/행정 영역에서의 형식적 논리의 중요성 이야기를 하면 여전히 의문을 갖기 마련이다. 실질과 민의를 매번 따지는 것이 오히려 옳은 것이 아닌가? 형식 주의는 기본적으로 실질을 매번 조금씩 혹은 많이 도외시하는 것 아닌가? 와 같은 의문이 자주 등장하는 의문이다. 그럴까? 매사에 실질을 따지는 건 쉽지도 않을 뿐더러 민의가 과연 무엇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는 걸 생각해 봐야 할 것이지만, 그보다는 법률이나 시행령, 법해석이라는 형식 자체가 기본적으로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에 거기서 일탈하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실질의 반영이 어렵다'는 사람 중 일부분은 (소수겠지만) 그 규정이 있음으로해서 피곤해 하는 그런 이해당사자일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반대로 그런 지적이 정말 타당한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정말로 무의미한 형식, 무의미한 법률이 있을 수 있고 그럴 때마다 그걸 없애고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어야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 국회의원들이 법안을 계속 내거나 철폐하는 것을 실적화(입법 실적)하여 공표하는 것이고, 국민 청원이라는 제도도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돌릴 수 있기 만무하다. 저런 식의 프로세스는 평시의 상황에서나 적용 가능한 것이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 즉, 당장 지금 목전에 와있는 미증유의 재난 상황, 이미 터진 전시에서는 형식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마련이다. 애초에 형식주의에서 정해둔 그 형식을 일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범죄자들, 탈세범들이나 혹은 외세라면 더욱 문제가 되기 마련이다. 이런 이들을 대비해서 규제나 대비책을 촘촘히 마련해두면 그건 정직한 일반 시민들의 삶을 고통으로 만드는 게 될 것이고, 반대로 허술하게 만들면 그런 이들이 활개칠 영역이 더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를 대비해서 보통은 고위직 주관의 TF 체계를 만들 수 있는 "형식"들을 사전에 갖춰두는가 하면, "일반위임"과 같은 형식적 결단을 미리 법에서 예비해두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경찰관의 업무 범위에 대한 기본법인 「경찰관직무집행법」에는 제2조제5호라는 일반적 위임 규정이 있는 거고 「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 「계엄법」 같은 법이 있는 것이고, 각 법률에도 예컨대 「고용정책기본법」 제30조의3(고용재난지역에 대한 지원) 같은 규정을 두는 것이다. 


 이런 예외를 두는 이유는 그것이 민의나 실질을 제대로 받지 못할까봐, 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 모든 미래 상황에 대해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절차적인 하자는 그것이 실질과 무관한 형식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전체 행위 자체의 위법성으로 가게 되는데, 예컨대 정말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업임이 명백하게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업이 「환경영향평가법」 제9조에서 정하는 사업이고, 동법 제13조에 따른 공청회를 안했다면 그 사업은 환경영향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업이므로 그 사업에 대한 허가도 위법해지는 것이다. 이건 실질과 상관이 없고 오직 형식 요건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명백하다면 민의와도 관계가 없을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현대 민주주의란 것은 실제로는 민주주의, 대의제, 공화주의, 입헌주의, 기본권사상 등등등이 결합되어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결합되어 돌아가는 기본 원리의 근간은 "매사에 민의를 받들어 그대로"가 아니라 "민의가 결정한 큰 틀 내에서 그 범위에 따른 형식"이라는 형태로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정 절차가 틀린 경우 그것이 실질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행정절차에 따른 행정처분 자체가 위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현대적 국가 체제다. 이걸 너무 간과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싶다. 


*1. 그나마 이건 1965년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굉장히 간소해진 것이다. 그 전까지 적용되던 1570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정된 미사 방식에서는 세계 어디서 집전하든 무조건 라틴어로 각종 성사를 집전해야 했으며, 신부는 최소 매일 1건 이상의 미사를 집전해야 했고, 미사의 내용도 예컨대 영성체만 해도 이전에는 무조건 혀로 받아야 했다. 

Posted by Chloe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