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한다. 난 왜 종종 우울할까. 삶이 우울할 때, 정말로 때로는 밥만 먹고 잠만 잘 자도 풀리기는 하지만 그런 차원이 아닌 뜻모를 우울함이 날 묶을 때가 정말로 있다. 오늘처럼. 진짜 죽음에 닿아있기 때문에 그런걸까?

도메니코 페티. 멜랑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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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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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을 내리 쉬어 늦잠이 자연처럼 익숙해지고 난 아침은 그리 많은 잠을 자뒀어도 여전히 무거운 눈꺼풀을 치뜨느라 초라하기 짝이 없건만 그 날이 하물며 기상청이 정한 한파경보 발령일이라면 조금 더 힘겹기 마련이다. 뒷말 즐기는 이들의 호삿거리에 들썩일 여지까지 슴겁게 신경쓰느라 챙겨입지 못한 얇은 코트자락의 파인 앞가슴조차 맨살을 한 점씩 저며내는 한기는 얼굴과 손처럼 드러낸 곳에서는 차라리 얇은 회초리로 거듭 휘어치는 느낌처럼 얼얼한 고통처럼 기어들었다. 이런 혹한은 서로가 휘감은 염치와 선의를 깨벗겨 불만섞인 본성을 내뱉도록 만드는 혹서와는 조금 다르게 초라한 배타심으로 서로에 대한 관심을 잊게하는 이기성을 부려놓는게 아닐까 싶도록 가혹스럽다. 조금이나마 몸을 부대끼면서 만원 어치의 온기를 얻을만한 전철을 탈까 여름에는 결코 하지않을 고민을 하다 결국 환승장에서 겪어야할 추위를 지금 조금 얹어 감당하려는 마음에 직통버스를 기다리기로 하는 처량한 결심으로 승강장을 향했다. 새벽 여섯시의 시간은 정직하게 삶을 일구는 어떤 이들에게는 이미 늦은 시간인 법이다보니 이미 적잖은 사람이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렸고 경기로 가는 유일한 노선인 나를 위한 버스는 배치간격을 배나 어겨가며 소식이 없고보면 차고드는 바람에 슴벅이는 눈꺼울 뒤로 슬슬 천불 같은 것이 한가득이 찰랑거려 사람을 괴롭히기 마련인데 이쯤 춥고보면 도리어 그것이 가슴을 뜨뜻하게 덥혀주는 느낌까지 드는 것이다. 오래도록 버스가 오지 않고 보니 기다리는 사람도 승강장 가득 늘어서고 먼저 온 사람들은 이제는 네 켠 바람조차 막지 않는 간이 지붕 아래에서 기다리며 서 있는 추레한 모습조차 권리처럼 변화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조금 오래 기다렸다는 이유로 승강장 벽 뒤에서 바람을 피하고 있자고 하여 보니 저 켠 먼 골목부터 도드라진 빨간 패딩을 걸치고 따스한 계절에 그러했을 것보다 세배는 더 빠른 속도로 두두두 달려온 어떤 젊은 청년이 얇아보이는 가죽장갑 위로 부질없이 두 손을 부비며 아 추워, 정말 춥네를 연방 허공에 뱉으면서 내가 서 있는 벽 한 켠을 부비고 들어오고 나면 더더욱 그랬다. 이런 추운 날이면 살들이 차갑게 얼어버려 건드리기만 해도 날카롭게 베이는 기분이 드는 법인데 그 청년이 바짓 주머니에 늘어뜨린 사슬들이 처렁이도록 세게 밀치고 들어오는 가운데에서 내 구두를 자기 구둣굽으로 밟고 나면 그야말로 살을 떼어내는 절감을 하지만 악의로 그런 것일리 없는 이에게 앓는 소리하는 것부터가 힘든 추위 속에서 촐랑이며 말을 건네는 부터가 원치 않는 일이고 보니 조심스레 발을 떼어 도로가로 나와 서버렸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으니 비로소 도로의 자동차들 위로 피어 찰랑이는 아지랑이 뒤켠 먼데서 많은 이들이 애닳게 기다리던 노선이 오는 것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고작 13, 4분이 지났을 뿐인데 하루처럼 오랜 기다림인지라 사람들은 서로 반가움에 탄식하고서 곧 다다를 버스가 설 곳을 예측하여 도로켠에 내려와 서기 시작했으나 진즉부터 내려와 있던 나는 이미부터 버스 설 자리를 생각해온 지라 그리 큰 걱정없이 올라타 따스함에 손을 녹일 생각만 하는지라 다른 생각없이 버스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 앞서 그 청년이 저 먼 앞켠에서 버스가 진작 서도록 도로에 내려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막연한 짜증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버스의 연쇄 중 맨 앞에 서 달리는 그 노선 차장은 청년의 몸바친 요청에도 뒤이은 버스에 등떠밀려 내 서 있는 곳까지 주저없이 더 움직인 건 나 역시 잘라질 추위 탓에 내 원하는 것이었으되 청년만 보고 따라붙은 사람들이 우루루 내 서 있는 쪽으로 달려드는 건 내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늦게 나온 턱에 가장 기민한 건 그 청년이었고 버스에 제일 앞장서 올라탄 것도 닫아온 힘결에 나를 세게 밀쳐낸 그 이였다. 기다리던 바로 앞에 선 버스에 서너번째까지 밀려나 올라타 앉아갈 자리도 없이 바람들어오는 시내버스 좌석간에 섰을 때 보이는 건 두터운 빨간 패딩에 두툼하니 흐붓하니 가는 눈을 뜨고 차창 위로 새어나오는 히터 바람에 몸을 녹이는 그 청년일 때는 불만섞인 말이 목구멍까지 치닫을 테지만 도리없이 입닫고 서서 가만히 있어야할 것이다. 그런 혼자만 느끼는 불만족의 균형은 그 청년이 이제 선바위를 넘어 내리고자 했을 때 비로소 흔들렸다. 온몸으로 자신이 따뜻하게 뎁혀 두었을 의자에서 엉덩이 끝을 바싹 붙인 채로 손끝을 밀어 벨을 울리려고 몇번을 신음하다가 결국 벨을 누르지 못하고 부대껴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픽하고 웃고 보면 그래도 내가 삼가지 못하고 여제없이 굴었구나 싶어 바라보니 여지없이 가득찬 사람들 사이에서 휘둘리는 날 보며 붉은 청년은 머리에 한껏 가득 뿔이 난 표정으로 칼끝처럼 날선 말을 쏘아붙일 때는 무어라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답할 수밖에 없다.

"저기요, 아가씨, 사람이 고생하는 걸 보면서 웃음이 나나요?"

"네?"

"손이 안닿아서 벨을 못누르는 거 같으면 이왕이면 보고 웃기 전에 좀 눌러주고 하면 서로 좋잖아요."

그이에게 앞선 두번을 괴롭힘 당한 뒤엔 나도 모를 분개심 같은 것이 치밀기는 했으나 이 지경으로 분개없이 치닫고 혹한처럼 사람을 찔러대니 오히려 도리없이 이건 오늘 날씨처럼 재변이다 싶어 마음 속이 잔잔히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바쁘게 사람들을 밀쳐 내면서 어 자기야 지금 나 가요. 응 춥지? 고생 많은데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그래, 라고 넓적한 전화에 대고 무어라 토닥이며 버스 뒷문 아래로 내려서는 그를 보며 도리어 웃음이 나오며 참 별 사람 다 있다, 하고 추위마저 잊고서 저런 이도 좋아서 저리 챙기는 여자애가 있다니 적견이 참 어렵구나 싶다는 생각을 하며 저런 이들에게도 오늘 하루가 평안할 수 있겠구나 싶어 픽하며 웃고서 이다지도 마음이 차분해지면 내려서 추운데, 같은 실없는 생각에 웃고서 마저 갈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Chl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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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는 할로윈 데이가 그냥 재미나게 젊은 것들이 춤추고 노는 날 내지는 애들이 재미진 무언가로 분장하고 다른 이웃 집을 찾아가서 "Trick or Treat!" 하고 외치는 정도의 날로 인식되어 있다. 오늘 한 언론에서는 서양에서 할로윈데이가 조상을 생각하고 귀신을 쫓는(.......)날이라고 말한다. 국어로는 대체로 제성절 혹은 만성절로 부르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조금 잘못된 이해이다. 서양이란 게 유럽에서 미국까지 다채롭고 역사도 그쪽도 수천년 단위인데 행사가 그렇게 단순할 리가 있나. 추석이 농부들이 그 해 지은 농산물을 갖고 하늘과 조상과 땅에 제례를 짓고 마을 축제를 벌이는 날이라고 하면 아파트에서 살고 공무원으로 밥벌어먹는 난 뭐야. (....) 서양인이 "한국 사람들은 단오에 창포물에 머리감고 남자들이 씨름대회를 벌여서 황소를 따내간대요"라고 하면 웃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할로윈 데이가 조상신을 기리고 잡귀를 쫓는 (........) 날이었던 적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 시절은 대충 켈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유럽에 살던 시절 이야기다. 켈트의 후예가 지금도 유럽에 있긴 하지만 스스로를 켈틱이라고 부르진 않듯이 (Celtic FC 제외(......)) 지금은 할로윈이 그런 날이 아니고, 아래 내가 설명할 것도 어디까지나 신구교 갈등하고 종교가 유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그 시절 이야기. 지금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우리의 추석처럼 의미는 거의 껍데기만 남아있고 걍 귀신 놀이하는 날 정도만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할로윈데이의 번역은 통상 제성절, 만성절이라고 하는데, 진짜 제성절(혹은 만성절)은 11월 1일이다.  이 날은 가톨릭에서 기리는 성인들로서 특별한 축일이 지정되어 있지 않은 모든 성인들을 위한 날, 즉 諸聖 혹은 萬聖(=모든 성인)의 날이다. 통상 중세 카톨릭의 토속적 교리에서는, 모든 날은 그 날의 수호성인이 있고, 그 수호성인이 그날 하루 동안 사람들을 지켜주며, 그 성인이 미처 막지 못하는 (역상성..?)부류의 망자들이나 혹은 잡령들만 세상을 돌아다니게 된다. 그런데 단 세가지 유형의 날은 여기서 예외가 된다. "모든 악마와 마녀의 밤" 발푸르기스의 밤(4월 30일)을 제외하면 그렇게 "막지 못하고 남는" 잡령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성령이 지키는 날 이틀이 그 대표적인 예외인데, 그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와 제성절이다. 

원래 만성절(제성절)은 실제로는 Hallow day이고, 이 그 전날이 Hallow eve, 즉 Halloween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날과, 모든 성인의 날은 당연히 모든 잡령들이 돌아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당연히 놀고 싶은(........)잡귀나 정령들이 다음날 못노는 만큼 그 전날 논다고 하여, 그 바로 전날들이 은비학(隱秘學, Occult)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 전날은 모든 잡령들이 돌아다니는 날이다. 즉 제성절 이브와 성탄절 이브는 신화적으로는 음습하고 음침한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려운 마귀와 잡령들에 대해 보호 조치를 개인들이 취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강구되는 보호조치는 크게 보면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로, 집을 특별한 성령의 가호를 얻을 수 있게 축복한다. 둘째, 잡귀와 망령들을 인도할 특별한 보호를 줄 존재를 가장한다. 셋째로 집 밖으로 나가야할 때는 우리 자신이 그들 망령과 마귀 중 하나인 것처럼 짐짓 꾸미어 그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한다. 가호를 받는 부분은 가톨릭의 위세가 약해진 이후에는 크게 별 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 부분이고, 오늘날까지 이어져내려오는 양키(....)들의 풍습은 그 뒤의 두 가지이다.


 잭 오 랜턴은 슬픈 전설을 가진 자를 일컫는 이름이다. 위스키를 매우 좋아한 (남자다!) 주당이던 잭은 여느날처럼 매우 취한 상태로 귀가하던 어느날 마귀를 마주하게 되었다. 마귀는 그에게 몇가지 내기를 제안했고 잭은 그 내기를 속임수를 써서 모두 이기고 마귀를 지옥불 속에 돌아가게 만들었다. 마귀는 그에게 한 가지 저주를 내렸는데, 그것은 그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일견 방황하는 유대인 아하스 베루스와 유사해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영원히 헤메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 이후에 죽은 망령들에게 저승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그는 망령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힘을 갖게 된 망령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본 뜬 불을 켜둔 호박 얼굴(원래는 순무의 속을 파서 만들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구하기 힘든 순무 대신  호박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을 집 앞에 놓아둠으로서 망령들을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망령이나 귀신의 옷을 입혀 분장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귀신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그러면서 아이들의 천성대로 장난을 치게 함으로서 더더욱 귀신들이 아이들을 동종업계종사자(....)로 착각하여 해꼬지 하지 않도록 하며, 아이들은 귀신 답게 상납(....)을 바라면 사람들은 그것이 귀신인 것처럼 속은 양 짐짓 먹을 것을 주는 식으로 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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